회원로그인




 

만남의광장

(후기)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천만에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승호 작성일07-11-22 17:01 조회983회 댓글0건

본문

어느 풀코스 4시간 주자가 이봉주 선수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42km를 2시간여만에 뛸 수 있습니까?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자 이봉주 선수가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4시간 동안이나 계속 뛸 수가 있습니까? 저는 그게 더 놀랍습니다"
우스개 소리겠지만,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일 겁니다.

제가 '울트라 마라톤'을 시작한 동기가 그렇습니다.
풀코스를 뛰어넘는 도전으로 울트라를 택한 철인 여러분들께는 부끄럽습니다만,
제게 있어서 울트라는 'beyond full-course'가 아니라
풀코스가 두려워 선택한 '제3의 길'입니다.
워낙 스피드와 친하지 않기 때문에 풀코스를 제한시간(5시간) 안에 들어올
자신이 없어서 여지껏 도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 눈에 들어왔던 것이 '울트라 마라톤'

지난 8월에 정말 겁없이 중랑천 50km 울트라를 뛴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제한시간이 7시간이어서 저의 속도(km당 7분 정도)로 뛰어도
제한시간 안에 충분히 들어올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제한시간 내 겨우 턱걸이 완주...

준비되지 않은 도전이었던 만큼 주위의 많은 분들에게 걱정을 끼쳤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솔직히 내게 울트라는 아직 무리다. 다시는 사고치지 말자"

그렇지만 이번 서울울트라 공고를 보고 조금씩 조금씩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내게 울트라는 불가능한 것일까?'
'내가 50km를 완주한 게 단지 운이었을까?'

그러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 한번만 더 뛰자. 딱 한번만 더...
완주를 한다면 내 자존심을 입증하는 셈이니까 더이상 울트라를 뛸 필요가 없고,
실패한다면 그게 내 수준이니까 미련두지 말자'

처음에는 100km를 생각했으나 그건 정말이지 용기가 아니라 객기일 것 같아서
양심적으로 63km를 선택했습니다.

나름대로 전략도 세웠습니다.
초반 20km는 km당 6분30초 속도로,
그뒤 40km까지는 7분 속도로,
이후에는 7분30초 속도로...
그러면 대충 7시간 25분 정도 걸린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제한시간이 8시간이니까 30분 넘게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 이 정도로만 뛰자...절대 걷지 말고, 또 오버하지 말자'

대회 전날 잠을 설쳤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때 소풍가기 전날밤, 또 대입 학력고사 치기 전날밤 같은 기분에
싱숭생숭해서 잠이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뒤척이다 알람이 울려 일어나니 새벽 2시50분.

올림픽공원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여~엉 이상했습니다.
추울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거기다가 강풍까지 불어 천막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출발이 얼마 안 남았으니 밖으로 나와 스트레칭하라는 방송이 있었지만
사람들이 서로 눈치보면서 먼저 안 나가려고 할 정도였으니...
윗옷을 2개나 입었지만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주최측에서 준 비닐을 덮어써도 너무 추웠습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도전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제가 대회에 나가면 사람들이 우르르 출발한 다음에 조금 한산해지면 느지막히 출발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북적북적한 무리에 섞여서 출발했습니다.
사람들 틈에 있지 않으면 너무 추울 것 같았습니다.

"촤르르륵... 촤르르륵... 촤르르륵"
시골 풀벌레 소리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온 귓전을 맴돌았습니다.
수백명이 입은 비닐이 일제히 바람에 쓸려내는 소리였습니다.
매서운 칼바람은 무서웠지만, 시끄러운 그 소리는 다행히도 내가
수백명 무리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증거였습니다.

한강으로 나오니 추위와 바람은 더 심해졌습니다.
광진교에서 유턴해 서쪽으로 방향을 트니, 오~마이갓~~~ 맞바람이었습니다.
10명, 20명씩 무리를 지어 뛰는데 같은 그룹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앞에 뛰는 분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그 뒤에 붙어가면 조금이라도 덜 추울까 해서
바짝 붙어서 뛰었습니다.
자존심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그때 생각은 오로지 이것 뿐이었습니다.
'내가 사는 길은 이 그룹에서 떨어지지 않는 길 뿐이다'

탄천 입구까지 7km 정도를 그렇게 악을 쓰며 뛰었습니다.
저는 LSD를 할 때도, 같이 뛰다가 힘들면 다른 분들에게 먼저 가시라 하고
제 속도로 뛰는 독립군 스타일입니다.
그런 제가 목숨걸고 죽어라고 아둥바둥 무리 속에 끼여 그 속도대로 뛰었습니다.
아마도 이때 너무 진을 뺀 게 아닌가 싶습니다.

탄천으로 접어들자 거짓말같이 바람이 사그라들었습니다.
거추장스런 비닐을 벗어버리고 싶었으나 조금 뒤에 다시 한강으로 나갈 생각을 하니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40km까지는 목표 시간대로 달렸습니다. 4시간 30분 걸렸으니까요...
그러나 풀코스도 아직 뛰지 못한 저의 한계가 거기까지였던가 봅니다.
그 뒤 45km 지점까지 겨우 5km를 가는데 1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뛰어도 뛰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5km 이상을 뛴 것 같은데도 표지판이 안 나타나길래 자원봉사자들에게 물어보니
2km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km당 8분 속도로 40분을 뛰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시계를 보내 15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걷거나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추워서...
속도도 안 나가고, 진도도 못 나가고, 서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방법은 하나 뿐이었습니다.
계속 뛰는 것... 뛰기 싫어도 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직선으로 쭉 뻗어있는 한강 조깅로에서
앞으로 봐도 사람이 하나 없고, 뒤로 봐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추운날 날뛰는 미친 놈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겠더라구요ㅋㅋㅋ
그래도 제 자신이 행복하고 다행스러웠습니다.
'100km 안 뛰기를 너무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와중에 중간중간에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큰 힘이 됐습니다.
"762번 조승호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소리쳐주고,
"이것 먹는게 더 도움이 될 거에요"라며 내 상황에 맞는 먹을 것을 골라주고,
"지금 몸상태에서는 이렇게 스트레칭하는게 더 좋아요"라며 자세를 가르쳐주고...
너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습니다.
'가만히 서있으면 얼마나 추울까?'
서있는 그들에 비해 뛰는 제 자신이 행복스러웠습니다.

반쯤 나간 정신에 터벅터벅 골인하니 7시간 45분 06초.
63명 완주자 가운데 53등 (남자 63km)
보잘것 없는 기록이지만 제 자신에게는 한없이 뿌듯한 성적입니다.

누가 마라톤을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했나요?
최소한 이번 마라톤대회 만큼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라 '추위와의 싸움'이었습니다.
추위와 싸우느라, 달리는 내내 제 자신과는 엄청 친하게 지냈습니다.

보통은 감정이란 놈이 '힘드니까 조금만 걸어가자'고 유혹하고,
의지력이 '안돼. 느리게라도 뛰어야 해' 이렇게 서로 싸워야 정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번만큼은 감정과 의지력이 모두 한목소리로 제게 쉼없이 외쳤습니다.
'걸으면 추워서 죽어. 절대 걸으면 안돼'
덕분에 달리면서 제 자신과의 갈등은 없었고, 오로지 한 생각 뿐이었습니다.
'춥지 않을 만큼만 계속 뛰자'
'골인하면 따뜻하게 옷 입을 수 있다'

풀코스도 안 뛴 상태에서 울트라를 뛰었으니 며칠 동안은 다리를 어기적거리며 걸었습니다.
특히 전철 계단 오르내릴 때는 거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도 울트라의 훈장으로 생각하고 기분좋게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사나흘 지나니 일상생활에서 움직이는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이번만 뛰고 다시는 뛰지 말자'던 대회 전의 결심이 자꾸 흔들립니다.
100km를 뛰신 분들을 직접 보니 제 자신 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립니다.
'그래. 100km를 뛰어봐야 나중에라도 울트라 뛰었다고 큰소리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고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게 이런 행복한 고민을 남겨준 대회 참가자들, 열정적인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주최측에 감사드립니다.

###
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c) 2002 Seoulmarathon club All Rights Reserved. info@seoulmarathon.net
상단으로
M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