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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광장

직무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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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창수 작성일03-02-17 14:35 조회7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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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유기.

일요일 오전 10시 26분.
스톱워치를 00:00:00으로 리셋하고, 뉴스타트.
물론 마라톤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걷는 스타트다. 이렇게 나의 장거리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좀 지나자 옆 축구장에서 놀던 볼이 내 앞에 굴러온다.
순간 축구장에서 운동을 하던 사람들 모두 축구공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좀 운동장 안으로 차주었으면 하는 눈치다.
그들이 보기에는 어슬렁 거리며 산보를 하는 아저씨로 보이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마라톤을 하는 중이고 게다가 기록계측이 시작된 상태이다.
돌돌돌 굴러오던 축구공은 이제 내 진행방향 거의 정면으로 다가온다.
뻥~ 차주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이다.
순간 나는 방향을 틀어 공을 피했다.
나의 행동을 보고 주춤거리던 근처의 축구선수가 떠돌이 공이 된 볼을 향해 달려든다.
뭐 어쩌겠는가, 지금 나는 풀코스 중이며, 더군다나 시계가 작동하고 있는 기록체크 중이 아닌가.
어쩔 수 없다.

약 1키로 경과 지점인 광진교 반환지점에 이르자, 심상치 않은 모습이 보인다. 몇몇 분들이 깃발을 들고 서 계시고, 탁자가 마련되어 있고 또 탁자 위에는 음료수가 준비되어있다.
이 시각이면 반달 30키로 lsd도 철수한 시간일 텐데 대체 무슨 일일까 하며 다가 서 본다.
분명 마라톤대회가 열린 게 분명하다. 허지만 오늘 이 날짜에 개최되는 대회가 있다는 안내는 그 어디에서고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대회는 분명 열렸고 그 모습은 정확하게 반환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까이 접근해서야 ‘100회 마라톤’ 클럽에서 마련한 자체 대회인 것을 알았다.
선두구룹이라서 인지 무척 잘 뛴다.
너무 잘 뛰다보니 누가 보지 않더라도 솔직히 내가 쪽 팔린다.
거~ 왜 대회를 열어, 이 좋은 일요일 날 아침 쪽 팔리게하는지 상당히 불만이다.
가뜩이나 우측 가에 그어진 청색 띠 안 쪽으로 바짝 붙어 뛰는 데 그나마 고속 주자들 때문에 청색 띠 바깥 쪽으로 나가 뛰게 되었다. 혹시나 얼굴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봐 겁나서 땅 바닥을 보며 뛴다.
누가 시킨 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다.

그렇게 1키로쯤 가는 데 ‘어이~ 화이팅~’이라는 멘트가 들린다.
그제서야 죄 지은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맞은 편에서 정복이 형이 달려온다.
배터지는 집을 걷어치워서인지 마라톤복장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 트래이트 마크인 횟집 꼬깔콘 모자는 점포정리할 때 함께 넘겼는지 맨 머리로 달려온다.
사실 마라톤대회에서 꼬깔콘 안 쓰고 달리는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다.
‘앗, 정복이형! 힘내세요~’
기어코 걸리고 말았다.
다 정보 부재에서 비롯된 쪽 팔림이다.
이제부터 어떤 대회가 열리는지 이곳저곳을 뒤져 보다 철저히 알아봐야겠다.

탄천지점에서 또 정복이형을 만났다.
이곳에 준비된 급수대에서 물을 드시고 계신다.
그러니까 내가 5키로를 뛰어 이곳에 온 동안에 정복이형은 반환점을 찍고 돌아 7키로를 뛰어 온 것이다.
추월하는 것을 못 보았는데 불구하고 그곳에서 만난 까닭은 나는 강가쪽 도로로 뛰었고, 대회코스는 예전의 도로였던 이유로 서로 다른 코스로 달렸기 때문이다.
또 한번 쪽 팔렸다.
오늘 완전히 쪽 팔리는 날이다.
오후에나 나올 걸~
무척 후회스럽다.

‘물 먹고 가~’
‘아니, 괜찮아요~’
‘여기가 37키로 지점이야~’
‘그래요~’

...

‘먼저 가세요~, 저는 느리잖아요~’
‘그래~, 그럼 천천히 와~’

영동대교쯤 이르자 많이 벌어졌던 정복이형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내가 속도를 냈다기보다는 정복이형의 속도가 점점 떨어지는 것 같다. 성수대교 근처에서는 거의 100미터까지 다가 섰다. 조금 힘을 쓰면 두 번의 쪽 팔림 중 하나는 회복할 듯 싶었다.
그렇지만 나의 마라톤 신조 1호가 발동되었다. 무리는 곧 패가망신. 부상당해 몸 망가지고, 몸 치료하다 재산 날리고 등등 백해무익한 것 아닌가.

꼬불꼬불 성수대교 공사구간과 동호대교를 지나 직선구간인 한남지구에 들어서자 앞서가던 모습이 안 보인다. 사라졌다.
대신 매점 옆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이곳이 이번 마라톤대회의 출발점이고 골인점인 것을 알았다.
이것 저것 대회풍경을 살펴보던 중 첫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마라톤 시계’였다.

‘마라톤 시계’
현재 일반 큰 대회에서 사용하는 마라톤 시계는 옥외용이다.
이것은 햇빛이 내리쬐는 낮 시간에 사용하기 때문에 램프나 불빛을 이용한 문자표시기가 아니다.
그 이유는 램프나 불빛은 어두운 밤이나 햇빛이 미치지 않는 실내에서 효과적일지는 모르지만, 찬란한 햇빛 아래에선 맥을 못 춘다.
그러기 때문에 마라톤 시계는 램프나 불빛을 이용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고 대신 낮에 효과적인 기계식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숫자판을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 0부터 9까지 해당 세그먼트를 가리거나 혹은 나타나게 하여 숫자를 만들고 표시하는 방식이다.
연두색 야광 색상으로 표시되는 선두차 지붕에 설치된 마라톤 시계도 그렇고 모든 마라톤 대회의 아치에 달려있는 시계도 그런 방식으로 작동되는 시계들이다.

허나, 100회 마라톤 대회에 설치된 시계는 그런 시계가 아니였다. 실내용 소자로 만들어진 시계다.
f.n.d 혹은 l.e.d. seven segment라는 반도체 전자식 발광표시기로 만들어진 시계였다.
물론 요즘의 led(발광다이오드, 주로 세닥기나 은행에 순번 표시장치로 많이 쓰임)는 반도체기술발전과 더불어 상당히 밝아진 것은 사실이다. 미 스텐리라는 반도체제조회사에서부터 개발된 고휘도 다이오드는 그 사용목적을 자동차의 깜박이 램프를 대신할 목표로 삼을 만큼 놀라운 발전이다. 이전의 20미리에서 기껏해야 100미리 칸델라(촛불 밝기의 십분의 1정도)였지만, 지금은 1000미리칸델라를 넘어 그 이상 밝기의 다이오드가 많이 개발 되었다.
대낮에도 잘 보이는 요즘의 총천연 전광판들도 이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밝아도 거의 무한 밝기에 가까운 햇빛을 이기고 더 빛나기란 무리이다. 서울 시내에 설치된 전광판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대개가 햇빛이 정면으로 비추는 남쪽 방향을 피한 북쪽이거나 도로 여건상 어쩔 수 없는 동쪽 서쪽 정도이다.
앞으로의 과학발전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현 상태에서 발광다이오드로 만든 숫자표시기로 옥외에서 사용한단 것은 무리이다. 즉, 잘 안 보인다. 밤에는 모르지만, 낮에는 솔직히 안 보인다. 손으로 햇빛을 가려야 겨우 보일 정도다.

그런데 그 실내방식의 소자로 만든 마라톤 시계였다.
잘 안 보이는 것은 당연하고, 시계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거의 다 와서야 알았다.

순간 죄책감을 얻었다.
정복형님께서 ‘좀 먹고 가라’하여 음료수 한 잔 마시고 인사하고 지나쳤다.
머리 속이 복잡했다.
이런 현실의 여건을 반영한 마라톤 시계를 만들겠다고 시작한지 4개월이 지났다.

.낮에 잘 보여야 한다.
.건전지 몇 개로 최소한 1년은 작동되어야 한다.
.값이 저렴해야 한다.
.쓸데없이 크지 말아야 한다.
.옥외 악천후 상황에서도 잘 작동하는 장치여야 한다.
등등 여러가지 명제를 설정하고 검증과 분석을 한지 4개월.
드디어 머리 속에서 완전히 만들어졌다.
근데 그 뿐이다.

머리 속에서만 까작까작 작동거릴 뿐, 도무지 현실로 끄집어 낼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도리어 머리 속 완성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허탈감에 빠져있다.

이러고 있는 상황에서 발광다이오드로 만든 마라톤 시계를 사용하는 것을 본 것이다.
‘얼마나 필요하면 그런 방식의 시계라도 사용했겠는가’



[지금부터 헛소리입니다.]

내 민족 내 백성들이 이렇게 힘들어 하는 현실을 보면서, 도대체 허창수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머리 속에만 있으면 뭐 하는가.
이건 ‘직무유기’다.
만일 구상이나 하지 않고 또 완성이나 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뻔히 작동되는 것을 왜 끄집어 내지 않아 많은 백성들이 불편을 겪게끔 하고 있단 말인가.
이건 일종의 ‘범죄행위’이다.
어려움을 겪고있는 내 민족 내 백성에 대한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치사한 허창수.
이것을 어서 만들어 백성이 편안하고 또 수출까지 하여 달라를 벌어들여야 마땅한 소임인 것을 이 국가적 책무를 나 몰라라 하고 있으니 이는 곧 역적의 짓이다.

허창수.
허창수는 반성해야 한다.
어서 빨리 하루라도 빨리 마라톤 시계를 만들어야 한다.

...

허창수는 반성 많이 했습니다.
게으른 관계로 이번 제6회대회 때는 못 만들었지만, 분명코 혹서기대회 때에는 선 보이겠습니다.
약속합니다.
기대하십시요.
‘hur가 만든 마라톤 시계’
세계 유일무이의 독특한 방식의 마라톤 시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니 기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게으름을 피우지 못할테니까요.



hur. 곧바빠질개 허창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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