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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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세 작성일03-02-12 01:12 조회40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고생 많으셨읍니다.
보름도 안 남은 금강산 마라톤의 자세한 내용은
없습니까?
참고로 자칭 국수주의자의 금강산에 대한 유감을 좀
늘어 놓고자 합니다.
산이 좋아서,
부실한 허리치료를 위해 부지런히 등산을 하던 10 여년전
방송을 빙자하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몰래
들어가려고 잔 머리에 오기까지 부리던 적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잔꾀는 한수 더뜨는 이들에게 탄로나
수포로 돌아가고, 중국항로가 열리던 첫해에
바쁜 와중에 서둘러 나가느라 비자도 없이
중국으로 돌아 이틀만에 백두산에 올랐지만
불과 10분만에 몰려온 먹구름속에 갇혀
천지는 구경도 못하고 살을 에이는 빗발을 피해
서둘러 하산을 하고는 너무도 억울하고 아쉬워
새벽2시에 공산당원을 꼬득여
몰래 다시 올라가 몇시간을 떨다가 불과 10 여분 동안
천지를 보고는 감격하며 목이메어 애국가까지 부르면서도
못내 떨치지 못한 아쉬움이
일본 친구들이 찍은 사진첩과 비디오로만 접하던
금강산이었읍니다.
제1공화국시절 국제사회에서 피아노 신동 한동일과 어깨를 견주어
이승만 대통령께서 한국에는 인물이 둘 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던
사진작가 1호 김열수 선생님께서 3년여를 백두산에서 멋진 장면을
찍으려 노력하셨지만 비행기로 항공촬영을 할 수없었기에
한국내 공공 건물에 거창하게 걸린 백두산 사진은 거의 모두가 일본친구의
작품-상품이었기에 늘 화가 났고
살아 계시면 80세가 넘으셨을 김열수선생님은
북녁 길이 열린 지금 끝내 금강산을 카메라에 담아
보셨는지 근황를 몰라 안타깝습니다.
걸으실 수 있으면 아마 금강산 어느 골짜기에서 틀림없이
멋진 작품을 위해 셧터찬스를 지키고 계실 분이시라
고희의 연세에도 늘 사진을 찍기 위해 역사자료를 6킬로 쯤은 가방에 메고
북녁의 산하를 찍고 싶어 중국과 그 언저리를 헤메고 다니셨지만
그때도 일본 작가들은 금강산에 들어가 살 정도 였기에 더더욱
가슴이 아팠읍니다.
백두산에서 내려와 일행들을 한국으로 보내고는 홀로
금강산을 갈 수 없는 아쉬움에 어차피 들어간 중국에서
이태백이 중국 최고의 산 - 5 악(태산,형산,항산,숭산,화산)을 본 연후에야
오르라고 한, 한번 오르면 신선이 된다고 하는 황산을 찾아
상해로 날라가 685 킬로를 14시간이나 가는 기차를 중국에서 감히 무임승차
(속칭 쎄비차 라고..)하여 우여곡절 끝에 툰시에 내려 택시로 3시간을 더 달려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찾은
기암절벽, 노송과 구름속에 불쑥 솟은 황산을 맞은 감격은
10 여년이 지난 지금도
늘 다시 보고픈 첫 사랑에 대한 애절한 마음만 같읍니다.
그 후 늘 왜 이런 황산을 두고,
금강산이 세계에서 제일 빼어난 절경이라 했는가 하는 의문속에
살아왔읍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여행인지라 교통편이 없어
버스로 10 여시간, 배로 14 시간, 택시, .... 그저 상해쪽을 향한 것이라면
아무것이라도 타고 소주와 항주를 거쳐 사흘만에 돌아온 상해
에서는 북한으로 끌려 갔을 거라고 대책을 세우기까지 했었다는데...
우연한 기회에 항주방송과 자매결연을 맺게되어 기념 사진전을
갖게 되었는데 동양화가분들이 진짜 산을 찍어 온것이 맞느냐고...
동양화의 원전은 황산인데 우리나라 분들은 본적이 없어
상상의 산수-동양화를 많이들 그렸다니...
사진 한장과 그 분들의 동양화 두점씩을 바꾸어 가시기까지
할 정도로 산은 역시 황산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던 지난 가을 카나다 가는 여행길에
한국방송공사 모 간부님이 쓰신 새로운 역사 연구서를 읽고는
온통 화두가 금강산으로 몸 마져 둥둥 떠다니는 기분으로 삽니다.
30 년 가까이 개인적으로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돌아 다니며
국수주의자를 자청한 제게는 실로 많은 충격이었읍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가 대륙 본토에 있었는데
세력이 약화된 조선조 초에 중국의 사대주의와
위도상 지명들을 12-15도 동쪽으로 옮겨 반도의 역사로 왜곡했고
일제가 36년동안 한술 더떠서 1만년 역사를 5,000년 역사로 줄이고,
자기네 일본 역사는 1,500년을 3,000년으로 늘려 놓는
크나큰 역사 왜곡을 국가사업으로 추진했었다니...
상해에서 100 킬로쯤 들어간 소주에서 만난 장보고 유적과
10 여년전
가야는 공자도 동경했다는 고조선을 찾아 귀화한 중국 남부 사람들이
세운 나라라든가, 황해를 내해- 국토안에 있는 바다 - 라고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젊은 역사학자들을 볼때만 해도 설마 했는데
10 여년의 각고끝에 책을 내신 그분의 주장에 근거와 일리있는
부분이 너무도 많았고
그중 중국의 황산이 고(구)려 제일의 금강산이었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10 여년의 의문이 시원스레 풀리는 것 같았읍니다.
북녁의 금강산-개골산도 아름답지만
진짜로 찾아야 할 너무도 아름다운 금강산 - 황산이
중원의 구름속에 선녀처럼 아스라히 기다림에
이토록 긴 사설을 늘어 놓았읍니다.
잃어버린 - 사라져버린 발해를 찾아
독립군들이 말달렸다는 소련 연해주의
야생마들이 뛰노는 지평선만 아련한 벌판을
대절버스로 온종일 달리고 또 달려도 끝이 없어
몸으로 느끼기라도 하자고 맨발로 한없이 걷던 아쉬움과
의문들도 풀려질 날들이
한 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다는 희열로
이 밤이 다가도록 떠들고 싶고
그 조상들의 한 맺힌 강토를 끝없이 달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북녁의 개골산부터라도...
이러니 중국, 러시아, 일본이
어찌 우리의 통일을 쉽게 쉽게 밀어 주겠읍니까 ?
너무 국수주의적인 점은 빼고 기억, 양해해 주시고...
보름도 안 남은 금강산 마라톤의 자세한 내용은
없습니까?
참고로 자칭 국수주의자의 금강산에 대한 유감을 좀
늘어 놓고자 합니다.
산이 좋아서,
부실한 허리치료를 위해 부지런히 등산을 하던 10 여년전
방송을 빙자하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몰래
들어가려고 잔 머리에 오기까지 부리던 적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잔꾀는 한수 더뜨는 이들에게 탄로나
수포로 돌아가고, 중국항로가 열리던 첫해에
바쁜 와중에 서둘러 나가느라 비자도 없이
중국으로 돌아 이틀만에 백두산에 올랐지만
불과 10분만에 몰려온 먹구름속에 갇혀
천지는 구경도 못하고 살을 에이는 빗발을 피해
서둘러 하산을 하고는 너무도 억울하고 아쉬워
새벽2시에 공산당원을 꼬득여
몰래 다시 올라가 몇시간을 떨다가 불과 10 여분 동안
천지를 보고는 감격하며 목이메어 애국가까지 부르면서도
못내 떨치지 못한 아쉬움이
일본 친구들이 찍은 사진첩과 비디오로만 접하던
금강산이었읍니다.
제1공화국시절 국제사회에서 피아노 신동 한동일과 어깨를 견주어
이승만 대통령께서 한국에는 인물이 둘 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던
사진작가 1호 김열수 선생님께서 3년여를 백두산에서 멋진 장면을
찍으려 노력하셨지만 비행기로 항공촬영을 할 수없었기에
한국내 공공 건물에 거창하게 걸린 백두산 사진은 거의 모두가 일본친구의
작품-상품이었기에 늘 화가 났고
살아 계시면 80세가 넘으셨을 김열수선생님은
북녁 길이 열린 지금 끝내 금강산을 카메라에 담아
보셨는지 근황를 몰라 안타깝습니다.
걸으실 수 있으면 아마 금강산 어느 골짜기에서 틀림없이
멋진 작품을 위해 셧터찬스를 지키고 계실 분이시라
고희의 연세에도 늘 사진을 찍기 위해 역사자료를 6킬로 쯤은 가방에 메고
북녁의 산하를 찍고 싶어 중국과 그 언저리를 헤메고 다니셨지만
그때도 일본 작가들은 금강산에 들어가 살 정도 였기에 더더욱
가슴이 아팠읍니다.
백두산에서 내려와 일행들을 한국으로 보내고는 홀로
금강산을 갈 수 없는 아쉬움에 어차피 들어간 중국에서
이태백이 중국 최고의 산 - 5 악(태산,형산,항산,숭산,화산)을 본 연후에야
오르라고 한, 한번 오르면 신선이 된다고 하는 황산을 찾아
상해로 날라가 685 킬로를 14시간이나 가는 기차를 중국에서 감히 무임승차
(속칭 쎄비차 라고..)하여 우여곡절 끝에 툰시에 내려 택시로 3시간을 더 달려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찾은
기암절벽, 노송과 구름속에 불쑥 솟은 황산을 맞은 감격은
10 여년이 지난 지금도
늘 다시 보고픈 첫 사랑에 대한 애절한 마음만 같읍니다.
그 후 늘 왜 이런 황산을 두고,
금강산이 세계에서 제일 빼어난 절경이라 했는가 하는 의문속에
살아왔읍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여행인지라 교통편이 없어
버스로 10 여시간, 배로 14 시간, 택시, .... 그저 상해쪽을 향한 것이라면
아무것이라도 타고 소주와 항주를 거쳐 사흘만에 돌아온 상해
에서는 북한으로 끌려 갔을 거라고 대책을 세우기까지 했었다는데...
우연한 기회에 항주방송과 자매결연을 맺게되어 기념 사진전을
갖게 되었는데 동양화가분들이 진짜 산을 찍어 온것이 맞느냐고...
동양화의 원전은 황산인데 우리나라 분들은 본적이 없어
상상의 산수-동양화를 많이들 그렸다니...
사진 한장과 그 분들의 동양화 두점씩을 바꾸어 가시기까지
할 정도로 산은 역시 황산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던 지난 가을 카나다 가는 여행길에
한국방송공사 모 간부님이 쓰신 새로운 역사 연구서를 읽고는
온통 화두가 금강산으로 몸 마져 둥둥 떠다니는 기분으로 삽니다.
30 년 가까이 개인적으로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돌아 다니며
국수주의자를 자청한 제게는 실로 많은 충격이었읍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가 대륙 본토에 있었는데
세력이 약화된 조선조 초에 중국의 사대주의와
위도상 지명들을 12-15도 동쪽으로 옮겨 반도의 역사로 왜곡했고
일제가 36년동안 한술 더떠서 1만년 역사를 5,000년 역사로 줄이고,
자기네 일본 역사는 1,500년을 3,000년으로 늘려 놓는
크나큰 역사 왜곡을 국가사업으로 추진했었다니...
상해에서 100 킬로쯤 들어간 소주에서 만난 장보고 유적과
10 여년전
가야는 공자도 동경했다는 고조선을 찾아 귀화한 중국 남부 사람들이
세운 나라라든가, 황해를 내해- 국토안에 있는 바다 - 라고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젊은 역사학자들을 볼때만 해도 설마 했는데
10 여년의 각고끝에 책을 내신 그분의 주장에 근거와 일리있는
부분이 너무도 많았고
그중 중국의 황산이 고(구)려 제일의 금강산이었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10 여년의 의문이 시원스레 풀리는 것 같았읍니다.
북녁의 금강산-개골산도 아름답지만
진짜로 찾아야 할 너무도 아름다운 금강산 - 황산이
중원의 구름속에 선녀처럼 아스라히 기다림에
이토록 긴 사설을 늘어 놓았읍니다.
잃어버린 - 사라져버린 발해를 찾아
독립군들이 말달렸다는 소련 연해주의
야생마들이 뛰노는 지평선만 아련한 벌판을
대절버스로 온종일 달리고 또 달려도 끝이 없어
몸으로 느끼기라도 하자고 맨발로 한없이 걷던 아쉬움과
의문들도 풀려질 날들이
한 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다는 희열로
이 밤이 다가도록 떠들고 싶고
그 조상들의 한 맺힌 강토를 끝없이 달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북녁의 개골산부터라도...
이러니 중국, 러시아, 일본이
어찌 우리의 통일을 쉽게 쉽게 밀어 주겠읍니까 ?
너무 국수주의적인 점은 빼고 기억, 양해해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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