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분단의 벽을 넘어서(금강산 육로관광 답사를 다녀와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동창 작성일03-02-10 10:20 조회89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반세기 분단의 벽을 넘어서 - 금강산 육로관광 답사를 다녀와서
여행춘추 대표이사 정동창입니다.
지난 5일-6일 1박 2일간 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이 아닌 육로
로 금강산 육로관광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아직껏 그날의 감동이 가득합니다.
그 마음을 함께하고싶어 몇자 적어봅니다.
2월 21일 일반인 들이 최초로 육로관광을 통해 가게됩니다.
아울러 금강산마라톤이 개최됩니다.
많은지원과 성원을 앙망합니다.
내게는 1912년 10월 8일 온정리 온천에서 구입한 사실이 색인되
어있는 금강산 대관(金剛山 大觀)이라는 제목의 아주 오래된 금
강산 관광 사진첩이 한 권 있다.
이 사진첩은 풍류가 많으셨던 외할아버지가 1912년 10월에 고향
인 충청도 서산을 떠나 속초를 통해서 고성을 거쳐 외금 강으로
열차를 이용해서 가셨다가 구입한 것이다.
꿈 많은 어린 시절 우연히 내가 이 빛 바랜 사진첩을 가지게 된
후 내겐 언젠가는 금강산 을 여행하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펼쳐보면 볼수록 금강산 일만 이천봉의 수려함이 사실적으로 잘
그려져있다.
대학시절 산악부 생활을 한 이후 내게는 설악산을 등반할때면 더
욱 금강산까지 가고싶은 충동으로 가득하였다.
백두대간의 맥을 이어 설악과 금강을 이어가는 산행에 대한 꿈
을 키웠다.
재미 산악인들이 금강산에 대한 산행 기사를 잡지에 기고한 내용
을 보다보면 공연히 가슴이 뛰곤하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금강산을 갈 수 있다고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한때는 금강산 여행은 힘든 것이려니 생각도 하였다.
하지만 어렵사리 해로 관광이 성사되어 금강산을 갔을 때는 좋
긴 하였지만 왠지 모를 거북스러움이 가득했었다.
통행의 부자유스러움, 위락시설의 부족, 금강산 관광의 단조로움
등이 한껏기대했던 금강산 여행의 꿈이 한계에 부딪히곤하였다.
그러한 한계상황을 벗어나보고자 북녁땅에서 최초로 2001년 2월
23일에 처음으로 달리면서 즐기는 금강산이란 슬로건으로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마라톤대회을 기획하여 성사시킨지 3년이
지났다.
당시는 누구도 금강산에서 어떻게 마라톤을 해 라는 의구심어린
눈총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정해진 지역이 외에서는 모두 행동이 부자유스러웠던 때이
고 보면 황당한 발상이었으리라.
하지만 대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북녁땅에서도 마음대로 달리
고 걸을 수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였다.
이는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하고 지내던 현대아산 직원들을 비롯
한 많은 이들의 마음은 감동과 기쁨으로 크게 자리하게된 계기
가 되었다.지난해는 미국 부시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행사
자체가 무산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잘
끝 났다.
금년에는 국내외적으로 복잡한 문제들 즉 북한의 핵문제, 정부
의 북한에 대한 자금지원문제, 미행정부의 대북 강경입장등으로
어느때 보다도 힘든 결정과정을 겪어야만했다.어릴적 키웠던 금
강산 여행에 대한 꿈이 이제는 육로로 남측을 출발하여 북측까
지 달리는 마라톤 대회를 진행하고픈 꿈으로 자리하고 있다.
어느새 육로 답사단에 함께 하여 통일전망대 남측 출입국 관리사
무소에 도착하였다.
이른 새벽 현대 아산측의 故 정주영 명예회장님에 대한 예를 올
리는 하남시의 선영에 함께 하였다.
평소 궁금도 하였지만 불굴의 도전 정신과 냉철한 판단으로 질곡
의 삶과 시련을 헤쳐나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정주영 명예
회장.
우리 나라 경제계의 한 시대를 풍미한 분에 대한 궁금증도 있고
하여 함께 참석하였다.
저진 검문소를 통과하여 통일전망대로 다다르는 길에 침묵이 흐
르고 있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과연 우리가 육로로 갈 수 있다는 것인가? 라
는 탄성도 흘러나왔었다.
통일전망대에 위치한 남측 출입국관리소에 다다르자 금강산내에
서 운행하는 버스들이 출입국관리 사무소 앞에 줄을 지어 대기하
고있는 것을 보는 순간 정말로 가게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
다.
하지만 함께 한 그 어느 누구도 말문을 열지는 않았다.
반세기만의 민족적인 사건이라 언론들이 집중적인 취재를 하고
있었다.
출입국 신고를 모두 끝내고 방북관련 서류를 제출하고는 빠져나
가 지정된 버스에 오르려니 정말로 가는구나하는 생각에 감회가
새롭다.
하얀 눈발이 휘날리는 사이로 인적 없이 군인들만 부산하게 움직
인다.
통일전망대를 지나 정적이 흐르는 남측지역을 통과하니 3중으로
된 철책 통문으로 빠져 들고 있다.
순간 침묵과 함께 반세기동안의 민간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던 비무장지대안으로 깊숙히 빠져들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비무장지대는 우리 민족이 엄청난 대가를 치른 역사
의 장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할 때 갑자기 뒷좌석에서 작은 외침
소리가 난다.
와! 고라니다.
뒤를 돌아 창밖을 보니 고라니 한 마리가 깡총깡총 뛰면서 우리
일행을 반겨주고 있었다.
남측 분계선에서 1.2km을 달려들어가니 북측한계선이 나오는데
300m을 더 들어서니 소총을 맨 북한군 초병 두 명이 기립 자세
로 서서 범상치않는 눈으로 우릴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반기는 것일까 ? 감시하는 것일까?
순간 모두들 얼어붙은듯이 조용했다.
모두들 짜릿한 경험을 하는 순간이었다.
어딘가 모를 전율이 온몸에 흘러들었다.
원래 철도 노반이던 것과 7번 국도 임시도로인 비포장도로을 달
리고있었다.
비포장으로 울퉁불퉁하면서도 비좁아 차 한대가 겨우 통과할 정
도의 길이었다.
이제 북녁땅이다.
반세기만에 금강산을 육로로 가고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 금
강산의 마지막 자락 적벽산(116m)이 가로막았다.
적벽산아래 도로공사 구간중 넓은 지역이 나타나자 북한측 출입
국관리 직원들과 군인들이 일일이 차내의 인원을 점검하러 다닌
다.
차내로 인민군복을 한 군인 3명이 들어오는 순간 일행은 숨을 죽
이듯 고요하게 움츠러들었다.
왜 그럴까? 53년만의 만남이 이리도 긴장감이 돌아서야하는 생각
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모두들 어떠한 돌발사태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을까?
도착하기전 오른쪽 동해바다쪽으로 선녀와 나뭇군의 전설이 서
린 감호가 얼음위 눈속에 가려져있다.
감호는 고성군 구읍리로부터 남쪽으로 6km 지점에 위치한다.
이 호수는 둘레는 약 3km이지만 호수가 거의 원형으로 되어있어
서 영랑호보다 더 넓다.
동쪽으로 긴 모래둑을 사이에 두고 동해와 인접해있다.
주위에 푸른 소나무들이 우거지고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곳이
라하여 옛사람들이 관동의 아름다운 세호수(동정호, 시중호, 삼
일포)와 견주어 감호라 칭송하였다한다.
하지만 지금은 감호의 자취와 기암괴석만 볼 수 있고 푸른 소나
무들은 온데간데 없어 씁쓸함을 더해준다.
다만 아직껏 해당화가 무리를 이뤄 피는 모래 언덕과 물 깊이가
낮은 습지로 생태계의 보고를 이루고있다.
인민군들의 통행점검이 끝나자 적벽산 끝자락을 빠져나가자 오른
편에 낙타등처럼 구부러진 구선봉이 보였다.
구선봉(187m)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기괴한 바위들이 칼날
이나 톱처럼 날카롭게 늘어서있다.
옛날 아홉신선이 산마루에서 바둑을 두었다하여 구선봉이라 불리
지만 아마도 필자의 생각으로는 보다 신비로운 생각을 북돋아 주
기 위하여 신선의 이름을 빌어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아래 적벽강을 가로질러 북으로 뻗은 긴 철교가 6.25당시 폭
격을 맞아 끊어진 채 철교 잔해들이 내려 앉아 있다.
다시 한번 민족상잔의 역사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장소여서 가슴
이 시렸다.
넓은 평원이 나오면서 옛 고성읍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폐허가 된 채로 그대로 방치된 옛날 열차 역사(驛舍), 옹기종기
토담집으로 모여있는 시골마을풍경이 시계바퀴를 몇 십년 뒤로
되돌려놓은것 같아 씁쓸한 심정이 들었다.
동네 사이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주민들의 삶 사이로 철모르는 어
린 동심만이 간간이 호기심 어린 표정들이 우리 일행을 물끄러
미 바라다 보고있었다.
어느새 그래도 우리에게 익숙한 곳 삼일포로 접어들고 있었다.
삼일포는 고성항에서 12km 위치해있는 곳이다.
옛날에 어떤 왕이 하루동안 머물다 가려다가 경치가 너무 좋아
서 3일 동안 머물다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할 정도로 호
수 풍경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관동 팔경의 하나로 이름을 떨쳤고 호수 풍경
으로는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삼일포 가는 길목으로 접어들면서 포장도로라서 훨씬 빨리 달려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침묵은 계속되고 있었다.
민간인들이 판문점을 거치지 않고 다른 지역의 도로를 통해 남북
으로 왕래하는것은 53년 휴전 협정체결이후 처음이라서일까?
고성항에 마련된 북측 출입국 관리 사무소을 통과하자 다소간에
일행들의 분위기가 살아났다.
통일전망대 남측 출입국관리소을 출발해서 비무장지대를 지나 7
번국도를 따라 고성항 북측 출입국관리소까지 총 39.4km의 거리.
시간으로는 1시간 20분 소요된 거리를 반세기 아니 53년 걸려왔
다는 감회를 생각했던 것일까?
하루를 머물고 구룡연 지역 산행을 하였다.
흰눈 덮인 구룡연 지역은 외금강의 가장 아름다운 경치답게 고
운 자태를 뽐내고있었다.
구룡연은 세존봉의 서북쪽 주위를 싸고도는 긴 골짜기에 이뤄진
명승지로서 신계사터가 있는 맨 아래 골짜기로부터 신계동, 옥류
동, 구룡동으로 이뤄져있다.
구룡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해질 무렵 하산하여 북측이 운영하는
금강원에서 북한식 만두와 냉면 그리고 비빔밥으로 점심을 하였
다.
모두들 그 독특한 맛과 북한식의 순박하면서 투박한 서비스에 흥
미로운 기분을 맛보았다.
육로관광이 보편화되면 북한식 전통 식사를 제공하는 금강원은
아마도 우리내 관광객들에게 명소가 될 듯 싶었다.
오후 3시에 북한측 출입국 관리 사무소을 통과하여 다시 어제 되
돌아왔던길로 향했다.
그 옛날 우리 외할아버지는 금강산의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을
두루두루 수일간을 유유자적하게 돌아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분명 그런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해본다.
아니 너무 사치스런 생각일까 싶다는 생각이다.
예까지 온 것만도 어디인가.
뒤돌아서 오는 길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로 혼미해졌다.
현대의 대북 송금문제로 나라는 온통 시끌벅적할 것이고, 국제적
으로는 연일 계속되는 미국의 대 이라크 공격등, 그리고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해서 또 한바탕 우리는 홍역을 앓을 것을 생각하
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대북관계와 금강산관광 만큼은 따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금강산 관광을 단지 북한에 퍼주기 관광이 아닌 평화 퍼오기 관
광으로 인식하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금강산을 분단 장벽을 뚫기 위한 만남의 장소. 남북 교류장, 평
화 관광의 장소로 인식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현실을 직접 체험 할수있는 평화 체험
관광코스로 만들어 많은 외국사람들이 자유로이 관광하게하고,
자연스러이 잘 보존된 비무장지대안의 자연 생태관광도 활성화시
켜야겠다.
아울러 우리에게 요즘 건강이 화두가 되고있다. 아름다운 자연속
에서 휴양과 스포츠, 모험 관광을 실현시켜야겠다.
세계적인 명산 금강산을 통해서 우리 나라가 하나가 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
돌아오는 길에 비무장지대안에서 어제 보았던 고라니 한 마리를
다시 보게되었다.
분명 고라니도 우리 일행을 반기고 있었다.
또한 이 도로를 달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아니 걸을 수만 있다고 해도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언젠가 우리는 이 도로을 이용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걷고, 달리
고, 자전거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자재
로 다니는 꿈이 상상이 아니고 현실이 되길 바랬다.
당장 2월 21일 일반인들이 최초로 육로를 통해 들어가 개최하는
금강산 마라톤 대회의 성공을 기원해 본다.
여행춘추 대표이사 정동창
여행춘추 대표이사 정동창입니다.
지난 5일-6일 1박 2일간 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이 아닌 육로
로 금강산 육로관광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아직껏 그날의 감동이 가득합니다.
그 마음을 함께하고싶어 몇자 적어봅니다.
2월 21일 일반인 들이 최초로 육로관광을 통해 가게됩니다.
아울러 금강산마라톤이 개최됩니다.
많은지원과 성원을 앙망합니다.
내게는 1912년 10월 8일 온정리 온천에서 구입한 사실이 색인되
어있는 금강산 대관(金剛山 大觀)이라는 제목의 아주 오래된 금
강산 관광 사진첩이 한 권 있다.
이 사진첩은 풍류가 많으셨던 외할아버지가 1912년 10월에 고향
인 충청도 서산을 떠나 속초를 통해서 고성을 거쳐 외금 강으로
열차를 이용해서 가셨다가 구입한 것이다.
꿈 많은 어린 시절 우연히 내가 이 빛 바랜 사진첩을 가지게 된
후 내겐 언젠가는 금강산 을 여행하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펼쳐보면 볼수록 금강산 일만 이천봉의 수려함이 사실적으로 잘
그려져있다.
대학시절 산악부 생활을 한 이후 내게는 설악산을 등반할때면 더
욱 금강산까지 가고싶은 충동으로 가득하였다.
백두대간의 맥을 이어 설악과 금강을 이어가는 산행에 대한 꿈
을 키웠다.
재미 산악인들이 금강산에 대한 산행 기사를 잡지에 기고한 내용
을 보다보면 공연히 가슴이 뛰곤하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금강산을 갈 수 있다고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한때는 금강산 여행은 힘든 것이려니 생각도 하였다.
하지만 어렵사리 해로 관광이 성사되어 금강산을 갔을 때는 좋
긴 하였지만 왠지 모를 거북스러움이 가득했었다.
통행의 부자유스러움, 위락시설의 부족, 금강산 관광의 단조로움
등이 한껏기대했던 금강산 여행의 꿈이 한계에 부딪히곤하였다.
그러한 한계상황을 벗어나보고자 북녁땅에서 최초로 2001년 2월
23일에 처음으로 달리면서 즐기는 금강산이란 슬로건으로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마라톤대회을 기획하여 성사시킨지 3년이
지났다.
당시는 누구도 금강산에서 어떻게 마라톤을 해 라는 의구심어린
눈총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정해진 지역이 외에서는 모두 행동이 부자유스러웠던 때이
고 보면 황당한 발상이었으리라.
하지만 대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북녁땅에서도 마음대로 달리
고 걸을 수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였다.
이는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하고 지내던 현대아산 직원들을 비롯
한 많은 이들의 마음은 감동과 기쁨으로 크게 자리하게된 계기
가 되었다.지난해는 미국 부시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행사
자체가 무산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잘
끝 났다.
금년에는 국내외적으로 복잡한 문제들 즉 북한의 핵문제, 정부
의 북한에 대한 자금지원문제, 미행정부의 대북 강경입장등으로
어느때 보다도 힘든 결정과정을 겪어야만했다.어릴적 키웠던 금
강산 여행에 대한 꿈이 이제는 육로로 남측을 출발하여 북측까
지 달리는 마라톤 대회를 진행하고픈 꿈으로 자리하고 있다.
어느새 육로 답사단에 함께 하여 통일전망대 남측 출입국 관리사
무소에 도착하였다.
이른 새벽 현대 아산측의 故 정주영 명예회장님에 대한 예를 올
리는 하남시의 선영에 함께 하였다.
평소 궁금도 하였지만 불굴의 도전 정신과 냉철한 판단으로 질곡
의 삶과 시련을 헤쳐나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정주영 명예
회장.
우리 나라 경제계의 한 시대를 풍미한 분에 대한 궁금증도 있고
하여 함께 참석하였다.
저진 검문소를 통과하여 통일전망대로 다다르는 길에 침묵이 흐
르고 있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과연 우리가 육로로 갈 수 있다는 것인가? 라
는 탄성도 흘러나왔었다.
통일전망대에 위치한 남측 출입국관리소에 다다르자 금강산내에
서 운행하는 버스들이 출입국관리 사무소 앞에 줄을 지어 대기하
고있는 것을 보는 순간 정말로 가게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
다.
하지만 함께 한 그 어느 누구도 말문을 열지는 않았다.
반세기만의 민족적인 사건이라 언론들이 집중적인 취재를 하고
있었다.
출입국 신고를 모두 끝내고 방북관련 서류를 제출하고는 빠져나
가 지정된 버스에 오르려니 정말로 가는구나하는 생각에 감회가
새롭다.
하얀 눈발이 휘날리는 사이로 인적 없이 군인들만 부산하게 움직
인다.
통일전망대를 지나 정적이 흐르는 남측지역을 통과하니 3중으로
된 철책 통문으로 빠져 들고 있다.
순간 침묵과 함께 반세기동안의 민간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던 비무장지대안으로 깊숙히 빠져들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비무장지대는 우리 민족이 엄청난 대가를 치른 역사
의 장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할 때 갑자기 뒷좌석에서 작은 외침
소리가 난다.
와! 고라니다.
뒤를 돌아 창밖을 보니 고라니 한 마리가 깡총깡총 뛰면서 우리
일행을 반겨주고 있었다.
남측 분계선에서 1.2km을 달려들어가니 북측한계선이 나오는데
300m을 더 들어서니 소총을 맨 북한군 초병 두 명이 기립 자세
로 서서 범상치않는 눈으로 우릴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반기는 것일까 ? 감시하는 것일까?
순간 모두들 얼어붙은듯이 조용했다.
모두들 짜릿한 경험을 하는 순간이었다.
어딘가 모를 전율이 온몸에 흘러들었다.
원래 철도 노반이던 것과 7번 국도 임시도로인 비포장도로을 달
리고있었다.
비포장으로 울퉁불퉁하면서도 비좁아 차 한대가 겨우 통과할 정
도의 길이었다.
이제 북녁땅이다.
반세기만에 금강산을 육로로 가고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 금
강산의 마지막 자락 적벽산(116m)이 가로막았다.
적벽산아래 도로공사 구간중 넓은 지역이 나타나자 북한측 출입
국관리 직원들과 군인들이 일일이 차내의 인원을 점검하러 다닌
다.
차내로 인민군복을 한 군인 3명이 들어오는 순간 일행은 숨을 죽
이듯 고요하게 움츠러들었다.
왜 그럴까? 53년만의 만남이 이리도 긴장감이 돌아서야하는 생각
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모두들 어떠한 돌발사태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을까?
도착하기전 오른쪽 동해바다쪽으로 선녀와 나뭇군의 전설이 서
린 감호가 얼음위 눈속에 가려져있다.
감호는 고성군 구읍리로부터 남쪽으로 6km 지점에 위치한다.
이 호수는 둘레는 약 3km이지만 호수가 거의 원형으로 되어있어
서 영랑호보다 더 넓다.
동쪽으로 긴 모래둑을 사이에 두고 동해와 인접해있다.
주위에 푸른 소나무들이 우거지고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곳이
라하여 옛사람들이 관동의 아름다운 세호수(동정호, 시중호, 삼
일포)와 견주어 감호라 칭송하였다한다.
하지만 지금은 감호의 자취와 기암괴석만 볼 수 있고 푸른 소나
무들은 온데간데 없어 씁쓸함을 더해준다.
다만 아직껏 해당화가 무리를 이뤄 피는 모래 언덕과 물 깊이가
낮은 습지로 생태계의 보고를 이루고있다.
인민군들의 통행점검이 끝나자 적벽산 끝자락을 빠져나가자 오른
편에 낙타등처럼 구부러진 구선봉이 보였다.
구선봉(187m)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기괴한 바위들이 칼날
이나 톱처럼 날카롭게 늘어서있다.
옛날 아홉신선이 산마루에서 바둑을 두었다하여 구선봉이라 불리
지만 아마도 필자의 생각으로는 보다 신비로운 생각을 북돋아 주
기 위하여 신선의 이름을 빌어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아래 적벽강을 가로질러 북으로 뻗은 긴 철교가 6.25당시 폭
격을 맞아 끊어진 채 철교 잔해들이 내려 앉아 있다.
다시 한번 민족상잔의 역사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장소여서 가슴
이 시렸다.
넓은 평원이 나오면서 옛 고성읍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폐허가 된 채로 그대로 방치된 옛날 열차 역사(驛舍), 옹기종기
토담집으로 모여있는 시골마을풍경이 시계바퀴를 몇 십년 뒤로
되돌려놓은것 같아 씁쓸한 심정이 들었다.
동네 사이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주민들의 삶 사이로 철모르는 어
린 동심만이 간간이 호기심 어린 표정들이 우리 일행을 물끄러
미 바라다 보고있었다.
어느새 그래도 우리에게 익숙한 곳 삼일포로 접어들고 있었다.
삼일포는 고성항에서 12km 위치해있는 곳이다.
옛날에 어떤 왕이 하루동안 머물다 가려다가 경치가 너무 좋아
서 3일 동안 머물다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할 정도로 호
수 풍경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관동 팔경의 하나로 이름을 떨쳤고 호수 풍경
으로는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삼일포 가는 길목으로 접어들면서 포장도로라서 훨씬 빨리 달려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침묵은 계속되고 있었다.
민간인들이 판문점을 거치지 않고 다른 지역의 도로를 통해 남북
으로 왕래하는것은 53년 휴전 협정체결이후 처음이라서일까?
고성항에 마련된 북측 출입국 관리 사무소을 통과하자 다소간에
일행들의 분위기가 살아났다.
통일전망대 남측 출입국관리소을 출발해서 비무장지대를 지나 7
번국도를 따라 고성항 북측 출입국관리소까지 총 39.4km의 거리.
시간으로는 1시간 20분 소요된 거리를 반세기 아니 53년 걸려왔
다는 감회를 생각했던 것일까?
하루를 머물고 구룡연 지역 산행을 하였다.
흰눈 덮인 구룡연 지역은 외금강의 가장 아름다운 경치답게 고
운 자태를 뽐내고있었다.
구룡연은 세존봉의 서북쪽 주위를 싸고도는 긴 골짜기에 이뤄진
명승지로서 신계사터가 있는 맨 아래 골짜기로부터 신계동, 옥류
동, 구룡동으로 이뤄져있다.
구룡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해질 무렵 하산하여 북측이 운영하는
금강원에서 북한식 만두와 냉면 그리고 비빔밥으로 점심을 하였
다.
모두들 그 독특한 맛과 북한식의 순박하면서 투박한 서비스에 흥
미로운 기분을 맛보았다.
육로관광이 보편화되면 북한식 전통 식사를 제공하는 금강원은
아마도 우리내 관광객들에게 명소가 될 듯 싶었다.
오후 3시에 북한측 출입국 관리 사무소을 통과하여 다시 어제 되
돌아왔던길로 향했다.
그 옛날 우리 외할아버지는 금강산의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을
두루두루 수일간을 유유자적하게 돌아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분명 그런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해본다.
아니 너무 사치스런 생각일까 싶다는 생각이다.
예까지 온 것만도 어디인가.
뒤돌아서 오는 길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로 혼미해졌다.
현대의 대북 송금문제로 나라는 온통 시끌벅적할 것이고, 국제적
으로는 연일 계속되는 미국의 대 이라크 공격등, 그리고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해서 또 한바탕 우리는 홍역을 앓을 것을 생각하
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대북관계와 금강산관광 만큼은 따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금강산 관광을 단지 북한에 퍼주기 관광이 아닌 평화 퍼오기 관
광으로 인식하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금강산을 분단 장벽을 뚫기 위한 만남의 장소. 남북 교류장, 평
화 관광의 장소로 인식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현실을 직접 체험 할수있는 평화 체험
관광코스로 만들어 많은 외국사람들이 자유로이 관광하게하고,
자연스러이 잘 보존된 비무장지대안의 자연 생태관광도 활성화시
켜야겠다.
아울러 우리에게 요즘 건강이 화두가 되고있다. 아름다운 자연속
에서 휴양과 스포츠, 모험 관광을 실현시켜야겠다.
세계적인 명산 금강산을 통해서 우리 나라가 하나가 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
돌아오는 길에 비무장지대안에서 어제 보았던 고라니 한 마리를
다시 보게되었다.
분명 고라니도 우리 일행을 반기고 있었다.
또한 이 도로를 달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아니 걸을 수만 있다고 해도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언젠가 우리는 이 도로을 이용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걷고, 달리
고, 자전거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자재
로 다니는 꿈이 상상이 아니고 현실이 되길 바랬다.
당장 2월 21일 일반인들이 최초로 육로를 통해 들어가 개최하는
금강산 마라톤 대회의 성공을 기원해 본다.
여행춘추 대표이사 정동창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