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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어느 겨울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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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창수 작성일03-01-13 19:40 조회7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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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어느 겨울새벽.


맹위를 떨치던 강추위가 물러가고, 몇 일 포근한 날이 계속된다. 며칠 후 또 다시 강추위 온다는 보도가 있던 터라, 포근하게 시작한 오늘 하루도 요 며칠처럼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습관처럼 문 열고 내다보는 새벽 창 밖은 안개로 가득하다. 단지 내 켜 놓은 가로등 불빛으로 창 밖은 온통 붉게 물들어져있다. 현재 서울 지역의 온도는 영하 2도라는 뉴스방송이 나오고는 있지만 바깥은 그다지 춥지 않게 느껴지며 도리어 포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신발 끈을 동여 매고 장갑을 끼며 계단을 내려 올 때면 마치 전쟁터에라도 나서는 듯 '한 번 해보자' 하는 다부진 마음을 먹곤 한다.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닌데 늘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좀 의아하기도 하다. 사실 모두들 잠에서 풀리지 않은 이 시각에 정막을 가르며 나서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곧 있으면 온 몸은 젖을 것이고 헉헉댈 시간을 잠시 있으면 맞이해야 하니 이 정도의 당찬 마음을 갖는 것도 어쩌면 괜찮을 듯 싶다.

아침을 여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꽤 많다. 마을버스 운전기사 아줌마도 그렇고, 도로를 청소하는 미화원 부부도 그렇다. 버스 가판대 매점의 아주머니도 분주하게 신문을 접어 가판대에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다. 비록 작은 가판대이지만 늙은 부부 두 내외가 꼬박 자리를 지켜가면서 꾸려가기란 괘 벅찬 듯 늘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아저씨가 가게를 볼 때며는 늘 졸고 있는 모습을 보기 십상이다. 수시로 손님들이 찾아오는 까닭에서인지 항상 서서 조는 모습이다.

여기서 한강시민공원까지 거리가 궁금했었는데 최근에 세워진 안내판에 1,700m라고 적혀있어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생수 작은 병 하나를 사서 홀짝홀짝 마시며 공원으로 나간다. 좀 불만이 있다면 이처럼 겨울이라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냉장고에서 꺼내 사먹는 일이다. 마실 때 차가운 것은 둘째 치고라도 물병을 든 손이 시려워 번갈아 들고 가기가 일쑤이다. 그냥 맹물이면 좋으련만 그렇게는 팔지 않는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이유는 냉장을 하기 위해서보다는 그냥 물건 진열을 하기 위한 듯 하다. 거의 물 한 병을 다 마실 때면 공원에 도착한다.

공원의 토끼굴을 막 빠져 나오면 기분이 시원하다. 불어오는 강바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시야부터가 우선 시원하다. 다니는 자동차나 사람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주위를 살펴야 했던 시선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거리에 들어선 건물들로 인하여 갑갑하게 막혔던 시선 때문이었을까. 하였튼 이곳에 서면 시야는 한 점 거침 없이 마음껏 내 달리고 그 때문인지 시원한 느낌이다. 탁 트인 넓은 시야가 내게 들어오기보다는 풀밭에 풀어놓은 개처럼 내 시야가 이리저리 한껏 뛰노는 듯 싶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막힘 없이 시원하다. 그래서인지 늘 이곳에 놓이는 이 순간을 좋아하고 또 항상 기대하는가 보다.

요즘처럼 춥지 않은 때에는 출발선에서 몸을 풀었다. 허리굽히기, 쪼구려뛰기, 가슴펴기, 발목돌리기 등 여러가지 몸풀기를 하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즘은 시계 스타트를 누르며 막바로 출발한다. 뛴다기보다는 거의 걷는 수준이다. 날이 춥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야외에 있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일까. 하였튼 몸 풀려고 일부로 가졌던 시간은 없애버리고 대신 1~2키로 정도 빠른 걷기로 출발선 도착 즉시 시작한다.

안개 가득한 주로는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하고 고요하다. 바람이 없는 날 안개가 끼는 것은 자명한 일이어서 새삼스러울 것 하나 없지만 이런 겨울날씨에 바람이 없다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지라 무척 고마울 따름이다. 허지만 안개가 끼어서인지 공간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치고 나가는 발걸음이 전처럼 가볍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왜일까 살펴보다가 그만 주로가 눈이라도 내린 듯 온통 하얗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불편했던 발걸음은 안개 낀 축축한 공간 때문이 아니라 바닥에서 찔끔찔끔 조금씩 미끄러지는 여린 빙판 때문이었다.

근 3년간 이 길을 달려봤지만 이런 길 상태는 처음 본다. 차라리 눈이라도 왔다면 관리사업소에서 모래라도 뿌려 놓겠지만 눈도 아닌 안개가 내려 서리가 되었으니 아무런 조치가 있을 턱이 없다. 하기사 한 겨울에 안개 낀 날도 흔하지 않거니와 그런 날 새벽에 나와 뛴다는 건 더더욱 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처럼 서리가 내린 주로를 처음 맞이한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였튼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뜩이나 걷는 수준의 달리기는 더 느려지게 되었다. 결국 진짜 걷는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노면이 미끄럽다 보니 멀리 바라봐야 할 시선은 자연스럽게 바닥을 살피며 뛰게 되었다. 서리 덮힌 바닥을 바라보는 순간 알 수 없는 현란함을 느꼈다. 안경이 잘 못 되었는가 해서 고개를 들어 가로등을 비비며 살피려하니 이내 없어지고 만다. 다시 바닥을 내려보면 또 현란함이 있고 또 고개를 들면 없어지고 하는 것이다.
히야, 이거 미치겠네’
그러다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바닥을 유심히 쳐다봐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뭐에 홀렸는가’ 생각하는데 또 나타나기 시작 한다.

이번에는 바닥을 쳐다보면서 달렸기 때문이 이 현란함의 등장부터 보게 되었다. 그 정체는 가로등 불빛이 서리 결정체에 반사되어 아울아울 거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잠시 사라졌던 것은 가로등 불빛이 미치지 않던 곳을 지났기 때문이다. 수도 없이 수 많은 서리 결정들이 불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고 있던 것이었다.
'세상에나!’
순간 탄성을 자아냈다. 무심코 늘 지나던 이 길이 온통 빛나는 보석들로 깔려 있는 것이다. 문득 군 시절 눈밭에서 포복하다가 햇빛에 빛나던 눈 결정체의 무지개 빛을 보고 감탄하던 일이 생각났다. 시선을 조금씩 돌릴 때마다 영롱한 빨강색, 연두색, 보라색으로 변하는 금속성 빛으로 쪼개지던 그 햇빛. 너무도 파란 겨울 하늘 아래에서 보았던 그 신비한 빛이 생각이 났다. 비록 나트륨 가로등의 주황 빛이기는 하지만 그때의 햇빛처럼 금속성 빛을 띠고 있다. 엄청난 수의 서리 결정들은 서로 제각기 방향으로 각도를 취해있는 터라 움직이는 나의 시선에 의하여 마치 작은 조명들이 수 없이 켜지고 꺼지는 것처럼 빤짝빤짝 빛나고 있는 것이다. 빤짝이는 어느 것에다 맞춰야 할지 모르는 촛점은 이내 흐트러지고 말았다. 흐트러진 촛점에 비춰지는 반짝임은 공간의 거리를 가름할 수 없게 하며 바닥이 아니라 내 몸 앞뒤 입체공간에서 빤짝이는 듯 보이게 한다. 마치 보석이 깔린 길이 아니라 보석이 입체로 떠 있는 공간을 달리는 것처럼 착각을 자아내게 한다. 하늘이 만들어준 보석길 그 입체통로를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것이다.

순간 혼자 보고 있는 것이 너무도 아쉽게 느껴졌다. 아니 너무도 아깝게 느꼈다. 같이 보고 함께 즐거워 할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질 못하니 정말 아쉽고 아깝기만 하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밝아지면서 공원의 가로등도 하나 둘씩 꺼져 간다. 햇빛 가린 안개 낀 아침이 한강에 찾아오면서 수 많은 보석들도 어둠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한 순간이었다.
그 한 순간이 내게 왔다 갔다.

안개 낀 어느 겨울새벽.
오늘 그랬다.



hur. 역시개 허창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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