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어느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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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광호 작성일02-12-29 18:04 조회5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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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28일 토요일.
새벽에 눈이 떠졌다.
간밤에 충분한 잠을 잤지만, 아마 시장해서였을까?
아니, 정신이 맑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격주 휴무 토요일.
정말 여유가 있다.
학교가는 아이와 함께 아침을 먹고, 한숨을 더 잤다.
간밤에 불려간 고기집에서의 망년회에서 꼬박 두시간을, 술 한모금, 고기 한점을 들지 않는
나를 보고 동료들은 의아해했었는데... 배가 고팠나보다.
사실 나는 지난 월요일부터, 회사 출근전의 한 공기를 제외하고는
종일 아무것도 먹지않기로 선언하고, 엊저녁까지 완벽하게 지켜왔던 것이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막내가 휴대전화기를 들고 침대로 온다.
"여보세요?"
"어, 광호가? 니 머하노. 나 ○○인데, 지금 과천역에서 △△를 기다리는데, 아직 안오네.
△△가 청계산을 못가봤다캐서, 예서 만나기로 했는데.
하산해서 막걸리 마실낀데, 니 금식한다니 불러낼 수도 없고..."
순간, 만나면 한없이 반가울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분은 50을 코앞에 두고도 마라톤 3시간 벽을 주파하려는
실력있는 아마추어 마라토너이자 대단한 문장가이고,
다른 하나는 180cm의 키에 100kg에 육박하는 거구지만, 달리기를 좋아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총명한 동갑내기 친구다.
아, 보고 싶다.
이 여유있는 토요일 오후에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고,
하산 후에 마시는 동동주 한잔은 얼마나 기가막힐까.
정말 가고 싶다.
하지만, 이번 주는 자제하기로 스스로 약속하고, 공개까지 해둔 터이니
선뜻 나가서 먹고 마실 수도 없었다.
"그래요, 형. 즐겁게 지내시고... 다음 주에는 꼭 봐요."
전화를 접어 침대맡에 올려놓고, 꿀맛같은 한 숨을 더 청했다.
눈을 뜨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
늦은 점심이다. 하지만 난 할 일이 없다. 점심과 저녁을 먹지 않으니...
요즘의 내 행동을 아내는 무척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
무계획적으로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어딘가에 탈이나기 쉽고, 더구나 지금 나이에
어디 고장이라도 생기면 이건 가장으로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아내는 내가 마라톤을 잘하기 위해서
체중조절 목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만 알고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식사를 하지 않으면 돼요?
음식을 줄여도 뭘 알고, 계획적으로 해야죠..."
아무도 내 속내를 모를 것이다.
주위에서는 심지어 내가 몸이 안좋거나 무슨 건강을 위해서 이러는 줄 아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해를 넘기면서 마지막 한, 두 주일 또는 심한 경우 한달간은
거의 술에 젖어서 살기 일쑤다.
조심스러웠다.
건강은 차치하고라도 연말에 마무릴해야할 업무도 많은데...
특히 술이라면 四足을 못쓰는 내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식사를 줄인다고 선언했지만 사실은 술을 먹지 않으려 낸 꾀였던 것이다.
존경하는 이□□박사님께서는 그렇게 스트레스 받으며 사는 내가 안됐다고 말씀하셨지만,
스트레스 받는 것은 정말 없으니, 불쌍할 일도 없다.
아내는 아직도 불만족스러운 표정이다.
"그래? 그럼 나가서 먹을까?" 했더니,
"당신은 먹지도 않으려면서 무슨 외식이예요?" 한다.
"먹으면 되잖아?"
"정말이예요?"
아내의 표정이 밝아졌다.
혹시 어디 탈이라도 날까봐 겁은 났지만 워낙 남편이란 자가 고집이 세니,
막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던 모양이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월화수목금토... 하루도
허튼 정신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성공한 것 아니냐...
내가 건실하게 생활을 하려는 것이 다 가족들을 위한 것인데
그들이 원하는 걸 못해준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아내가 원하는 쪽으로 하자.'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이렇게 마음을 먹자마자 갑자기
엊그제 크리스머스 이브에 막내 선물 사들고 오던 길가의 돼지갈비집이 생각났다.
환한 통유리 안으로 보이는 실내를 가득 채운 사람들, 익어가는 갈비냄새,
잔에 가득 채워진 맑은 소주... 얼마나 부러웠던가.
옳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간다...
"얘들아, 가자. 택시타고 가자."
"왜, 차 안가지고 가게요?"
"택시타고 가지. 날씨도 춥지 않고 가까운데 뭘..."
벌써 나는 속으로 꿍꿍이가 있었다.
쏘주를 마셔야하는데 차는 무슨 차?
드디어 아내와 세명의 사내녀석들을 앞세우고 갈비집에 들어셨다.
잘익은 고기 한점을 마악 집으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다시 과천의 그 선배였다.
"어? 머해? 나, 지금 △△하고 산에서 내려와서 막걸리 마시는데... 이거
부르지도 못하고, 미안한데?"
"미안하긴요."
대답하기가 마음에 걸렸다.(사실은 나도 지금 고기 먹으려는데요, 뭘...)
막걸리를 마시면서 둘이는 내 얘기를 안주로 많이 나눴으리라.
특히 요즘의 내 수상한 행동에 관해서.
"바꿔줄께, 기다려봐..." 친구를 돌려준다.
"야, 이누마. 너 평소에 술마시고 전화좀 하지말어, 이누마..."
수화기에 나온 친구는 커다란 목소리로 엉뚱한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그 친구가 할 줄 아는 욕은 '야, 이누마... 허허허.' 이게 다였다.
"괜차너?"
내 건강을 걱정해주는 말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야, 내 걱정은 말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라. 연말이잖냐..."
전화를 끊고나서 고기를 먹으려니, 좀 기분이 이상했다.
불과 6일 참은 것 뿐인데.
기분탓인지 생각과는 다르게 고기도 그리 많이 먹히지 않았다.
소주도 들어가는 속도가 전보다 매우 더디었다.
음식을 다 먹고, 아이들을 먼저 집으로 들여보내고, 아내와 영화관엘 갔다.
때가 지났지만 부담없는 영화로 생각되어 광복절 특사를 보았다.
어색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설경구와 차승원의 열연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는 제격이었다.
모처럼 아내와 바람을 쐬고 들어오니 제법 시간이 지났다.
아이들은 지들끼리 저녁을 해결했다.
챙겨주는 저녁을 들면서, 다시 반주를 곁들이는 나를 보더니 아내가 한마디 한다.
"쯔쯔... 도대체 당신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예요.
점심때 마시고, 극장에서 캔 맥주마시고 또..."
하지만 어때?
난 그래도 기분이 좋다.
일주일씩이나 이런저런 자리를 참아 몸 컨디션 좋고, 업무 말끔히 처리하고
차분하게 맑은 정신으로 연말을 보내는데, 이 정도야 괜찮잖아?
(2002.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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