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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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복진 작성일02-07-12 17:10 조회56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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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나의 첫 해외 출장은 1979 연도 에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3 년 전의 일이다
첫 여행지는 일본 동경을 거쳐, 홍콩, 호주의 시드니, 멜보른
그리고 다시 뉴질랜드의 웰링톤, 오클랜드를 도는 약 열흘 정도의
생애 첫 해외 여행이었다.
당시의 나의 경험은 너무나도 충격적 이어서 지금도 그 때 그 감흥을 잊을 수 가 없다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는 황홀한 구름의 온갖 기기묘묘한 모양새며,
세련돼 보이는 파란 눈 여자 승무원의 유창한 영어하며,
터져 나갈 것 같은 스커트 속 그녀의 둔부하며,
망측해라, 세상에 어떻게 다 큰 큰애기 옷이 그렇게 재단될 수 있나 ??
일부러 가슴을 부풀리게 하여 입은 듯한 유니폼 하며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들은 가슴이 원래 그렇게 크단다. 잘 먹어서 그렇다 한다.
심지어 기내식을 설명해 주는 호사스런 차림표의 인쇄 양식까지
모든 것 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었다
아직 해외 여행의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내 동생을 위해서
나는 가능한 모든 것을 내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동생에게 보여 주었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것들을 말이다.
심지어 기내에서 쥬스를 따라주는 플라스틱 컵도 가지고 와서
동생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 이것 봐라. 이게 케세이 퍼시픽 항공 타고 갈 때 기내에서 쥬스 따라주던
플라스틱 컵이다. 굉장히 딴딴하고, 이 면 좀 봐라 ! 월메나 매끄러운지 !
우리 나라는 아직 기술이 없어서 이런 것 못 만드나 보다. "
또 어떤 때는 ,
" 이것 봐라 ! 이건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해서 나눠준 호주 지도인데,
이 지도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당신이 호주를 여행 중 일 때 다치거나
아프면 제일 가까운 병원의 위치가 빨간 점으로 나타나 있으니 지체 말고
그곳으로 연락하거나 가십시오..... 이 얼마나 인간적인 문구이냐 ? "
이렇듯 눈에 보이는 것들, 그 중에 내가 가지고 와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가지고 와서 동생에게 보여 줬었다. 어떤 것은 그림으로 내가 직접
스케치 해왔고, 어떤 것은 현지의 관광 안내 소책자 귀퉁이에 나와 있는 그림들을
오려 가지고 왔고 , 어떤 것은 사진도 찍어 와서 보여줬다.
해외 여행의 기회하고는 멀리 떨어진 분야에서 일 하고 있는 동생이
내 깐에는 많이 안쓰러워서 그랬었다. 체구는 100 Kg 에 육박하는 거구이나
적어도 나의 눈에 보이는 내 동생은 항상 연약하고, 항상 무엇인가 부족하게
살아만 온, 언제나 나의 연민을 필요로 하는 존재 이었었기에 말이다
그 후로도 사정은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내 동생은 해외 여행의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동생 생각은 그런 식으로 오랜 세월 계속 되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동생이
불쌍해서 혼자서 눈물을 많이 훔쳤다. 이렇듯 신비하고 기가 막히는 구경을
동생은 하지 못해 나는 애가 많이 탔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동생은 나의 설명을 듣고, 그런 류 의 설명조차 생생하게 들을 수 없는 제 친구의
더 안쓰런 사람들에게 나의 경험담을 전달해 주고 있었나 보다.
" 헤 ! 웃기구 있네, 우리 성( 형 )이 그러는데... " 하면서 말이다.
나의 이런 형태의 동생 생각에 어려움이 있었다면,
어떤 물리적인 것이나 건축물 등 , 보여주고 설명해 주는 것은 그런데로 괜찮으나,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들은 가지고 와서 보여줄 수 가 없다는 사실이었고
그럴 때면 나는 으래껏, 너도 한번 나중에 가봐, 정말 굉장하다니까 !
라고 말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 들 중 하나가 예를 들면,
어쩌다 운좋게 맞닥뜨린 그곳 외국 현지의 고유 전통적인
축제 분위기, 이건 어떻다고 비교 대상이 없어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나의 부족한 언어 묘사 능력도 문제지만, 나랑 같이 자란 호남평야 시골 태생 동생의
상상력도 너무나 빤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는, 특히 내가 좋아하는 축구인데, 외국 현지에서 접해본 그곳 클럽 축구의
분위기는 나의 상상을 완전히 뛰어 넘고도 남았다. 단순히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팀의
경기가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도시 전체가 축제 속으로 빠져들고, 자기가 지지하는
클럽 팀의 원정 경기 응원을 위해 클럽 깃발을 꽂고, 자기 차량을 몰고 , 비싼
휘발유를 때며 미친 듯이 달려가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그 당시 외국 사람들이 만끽하는 일상 속 삶의 자유는
우리의 숨통을 죄는 남북 대치의 전쟁 공포와는 판이하게 다른
축복 받은 그곳 외국 사람들만의 전유물 이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설명 해 주어야 할까 ?
그저, 너도 다음에 한번 가봐, 가보면 알아 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적어도 나의 눈에 그들은 진정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그 전형으로 보였고,
그 분위기에 잠깐 젖어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선택받은 사람인 듯 싶었다.
그 분위기를 동생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 나는 눈물을 훔치곤 하면서 말이다.
축제를 통한 삶의 여유. 그 축제로 즐거움을 만들고 이야기꽃을 피워 가는 그런 사회...
코쟁이들은 정말 대단했고 복이 많은 사람들로 비춰졌다
실재로 그네들은 그랬다. 우리는 아직 배가 고프고 반공이 국시의 제일이던 그때 말이다
그런데, 그 후로 불과 20 여 년이 지난 금년 , 지난달,
기적이 일어났다. 나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에서...
내가 지금껏 평생을 보아오며 부러워한 그 일들이 내 두 눈앞에서 일어났다
나는 우리가 한 골, 두 골을 넣고 못 넣고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8 강, 4 강 진입을 하고 못하고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우리는 이번 월드컵을 즐겼다는 사실이다.
남녀노소, 온 국민이 최고의 엑스터시를 맛보았다는 것이다
경기 당일, 그 시간 그 게임을 그 장소에서, 혹은 그 장소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제 3 의 장소에서 즐겼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느 사이 이런 위치에 와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내 동생에게 설명하지 못해 생략해온 그런 상황이 나의 사랑스런 조국
대한민국 안 마당에서 벌어져 나의 빈약한 설명이 필요치 않고,
내 동생은 개인의 자유가 주는 무한의 아름다움과
그것들의 극대화가 꽃 필 때의 그 화려함을 스스로 맛보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신세대는 결코 상상해 보지 못한 그 자유,
혁명 공약을 외우고 , 우리 식 유신을 강요당하며 , 파출소 입구마다 펄럭이던
정의 사회 구현의 구두선을 매일 보아야 했던 우리의 참담한 시절에 그렇게 갈구하던
그 자유와 그것들의 우월성이 지천에 널부러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이미 매스컴에서 수 백 번도 더 떠들어서
내가 다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나는 대 - 한민국 !!! !! 의 4 강 진입 위업도 위업 이러니와
그 주변 분위기에 감격해서 울고 또 울었다.
내 평생, 외국을 떠돌아다니며 부러움 가득히 보아온 남의 나라 잔치를
우리도 우리 안 마당에서 한판 거나하게 펼쳤으니,
그것도 세계인 모두가 놀래 자빠질 정도로 훌룡하게 말이다.
코쟁이들 한마디에 일희 일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한결 같이 말했다.
" 한국을 본받자 ! 붉은 악마를 본 받자 ! 한국을 다시 보자 ! 다시 보러 가자 ! "
............
어제, 오랜만에 내 동생이 전화를 했다.
" 성 ! 점심 약속 없으면 나 가서 같이 먹어도 돼 ? 성 ?? "
그러고서 한시간도 채 안되어 동생은 내 사무실에 들어섰다.
내가 명명한 우리 사무실 입구의 골목길, " 히딩크 고샅 "을 걸어서
그 육중한 체구를 끌고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의 흘러내리는 땀을 딲으며
내 동생이 찾아 왔다.
송 종국이 어떻고, 이 천수가 어떻고, 홍명보가 어떻고 하며
우리의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가 대표 축구 선수들의 최신 뉴스를 서로 한 바탕
훑고 지나가고 ,
내 사무실에 걸린 태극기와 네델란드 국기에 대해서도 서로 한 마디씩 하며
함박 웃음을 터트리고 나서,
나는 내 동생에게 말했다.
이제 딴일 없으면, 무얼 보러 외국에 나갈 필요가 없게 됐다.
우리가 주인이고,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세계의 본보기이고
우리의 잣대가 바로 세계가 마땅히 재어 보고 따라야 할 표본이다.
백기완 선생이 월드컵 선수 숙소에 초청 강사로 가서 히딩크 앉혀 놓고
그랬다 잖니, " 코쟁이덜 잘 먹어 키가 커서 그렇지, 우리가 밀어붙이면
까짓거 안될 것 없다고.. 우리 대한민국, 우리 민족이 최고라고.. "
우리가 요번에 얼마나 장한 일을 했는고 하니,
그리고 우리가 요번에 얼마나 신이 나서 우리 자신을 즐겼는고 하니,
내가 아는 어느 초로의 여성 이야기를 들어볼래 ?
당 58 세 여성. 딸 둘이 이미 출가했고
손자를 보았으며,
부군은 정년 퇴직한 공무원. 현 거주지는 서울 구로구 오류동.
이 분은 TV로 한국 경기를 빠짐없이 보았단다.
감격으로 눈물도 훔치고, 긴장 초조감으로 가슴도 쓸어 내리고 하면서...
한국의 마지막 경기가 있는 날,
이 분은 생각했단다.
광화문 앞의 붉은 악마 현장에 꼭 가보고 싶다고..
어쩌면 남은 생애 결코 다시 오지 않을 신나는 우리 역사의 그 현장에,
자유가 충만한 젊음의 용광로 바로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지난 생애 그 동안의
굴종과 억압의 굴레를 보상받고 싶었단다.
그리고 오류동 집을 나와 전철을 타고 한 시간만에 광화문에 도착,
붉은 악마 용광로 속으로 당 58 세, 여성, 손자를 둔 할머니의 몸을 구겨 넣었단다.
햇볕은 얼마나 따겁고, 철푸덕 앉은 아스팔트는 얼마나 뜨거웁고,
땅 바닥에 쪼그려 앉은 몸뚱이는 얼마나 불편했겠니 ?
쉴사이 없이 질러대는 대- 한민국과 오 ! 필승 꼬레아의 연호 !!!
서너 시간의 엑스터시 속에 몸을 맡겨 생애 최대의 희열을 맛본 그 할머니는
붉은 악마 인파 속을 살며시 빠져 나와 , 질러 대는 함성으로 전화가 불가능하여,
집에 있는 남편, 할아버지에게 손 전화를 했단다.
여보, 영감 ! 빨리 전철 타고 이곳으로 나오시라고...
지금 이곳은 천국이요 ! 우리 세대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
남편 할아버지는 사양했단다. 그냥 집에서 TV로 보겠다고..
그러자 아내 할머니는 전철을 타고 광화문에서 오류동 집으로 득달같이 달려와
다시 같이 가자고 설득 했단다. 빨리 가자고, 조금 있으면 경기 시작이라고..
당신은 지금 그곳 그 분위기를 모르고 있다고... 얼마나 신나고 좋은지...
남편 할아버지는 고집을 꺽지 않고 그냥 집에서 TV를 보겠다고 했단다.
아내 할머니는 그럼 할 수 없다. 나 혼자라도 다시 광화문에 가서 붉은 악마와
함께 보겠다 라고 말하고 혼자서 다시 한 시간에 걸쳐 전철을 타고 광화문으로 갔었단다
그리고 다시 신나는 자유, 우리 민족의 축제,
끝없는 자기 희열을 유감없이 만끽했단다.
당 58 세, 손자를 둔 할머니가 말이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을 과감히 내 던질 수 있는,
인간이 인간답게 서로 어우리고 보듬으며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내 조국,
대한민국의 꽃방석에 털썩 몸을 내 던지고
감격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며 울었단다.
그 할머니의 두 손가락은 하늘을 향해, 끝없는 인간의 자유를 향해,
그렇게도 신날 수 없는 무한의 희열을 향해
우렁찬 대- 한민국 함성과 함께 뻗치고 또 뻗쳤단다.
다시 광화문에 도착 했을때 경기는 이미 전반전이 끝났지만 상관없었단다
생각 해 보라 ! 저게 만일 내가 해외 여행 중에 맞닥뜨린 광경이었다면
내가 어떻게 저 할머니의 심정을 내 동생, 너에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
안 그러느냐, 나의 사랑스런 내 동생아 !
내가 수많은 날들 해외를 돌아다니다가 맞닥뜨린
코쟁이들의 저런 축제가 우리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외계의 일로만 알았었는데, 그게 바로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다니,
동생아 ! 잘 보았느냐 ? 두 눈 똑똑히 뜨고 보았느냐 !
저거이 내가 그토록 너에게 보여 주지 못해 안달이었던
바로 그 장면이다. 지구상에서 오직 축복 받은 민족만 누릴 수 있는
선택된 순간들이다, 동생아 !
자, 우리 밥 먹으러 갈까 ?
어째, 요사이 좀 꺼칠해 보인다, 동생아 !
우리 뭐 먹으러 갈까 ?
서울
고덕 달림이
박복진
나의 첫 해외 출장은 1979 연도 에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3 년 전의 일이다
첫 여행지는 일본 동경을 거쳐, 홍콩, 호주의 시드니, 멜보른
그리고 다시 뉴질랜드의 웰링톤, 오클랜드를 도는 약 열흘 정도의
생애 첫 해외 여행이었다.
당시의 나의 경험은 너무나도 충격적 이어서 지금도 그 때 그 감흥을 잊을 수 가 없다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는 황홀한 구름의 온갖 기기묘묘한 모양새며,
세련돼 보이는 파란 눈 여자 승무원의 유창한 영어하며,
터져 나갈 것 같은 스커트 속 그녀의 둔부하며,
망측해라, 세상에 어떻게 다 큰 큰애기 옷이 그렇게 재단될 수 있나 ??
일부러 가슴을 부풀리게 하여 입은 듯한 유니폼 하며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들은 가슴이 원래 그렇게 크단다. 잘 먹어서 그렇다 한다.
심지어 기내식을 설명해 주는 호사스런 차림표의 인쇄 양식까지
모든 것 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었다
아직 해외 여행의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내 동생을 위해서
나는 가능한 모든 것을 내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동생에게 보여 주었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것들을 말이다.
심지어 기내에서 쥬스를 따라주는 플라스틱 컵도 가지고 와서
동생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 이것 봐라. 이게 케세이 퍼시픽 항공 타고 갈 때 기내에서 쥬스 따라주던
플라스틱 컵이다. 굉장히 딴딴하고, 이 면 좀 봐라 ! 월메나 매끄러운지 !
우리 나라는 아직 기술이 없어서 이런 것 못 만드나 보다. "
또 어떤 때는 ,
" 이것 봐라 ! 이건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해서 나눠준 호주 지도인데,
이 지도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당신이 호주를 여행 중 일 때 다치거나
아프면 제일 가까운 병원의 위치가 빨간 점으로 나타나 있으니 지체 말고
그곳으로 연락하거나 가십시오..... 이 얼마나 인간적인 문구이냐 ? "
이렇듯 눈에 보이는 것들, 그 중에 내가 가지고 와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가지고 와서 동생에게 보여 줬었다. 어떤 것은 그림으로 내가 직접
스케치 해왔고, 어떤 것은 현지의 관광 안내 소책자 귀퉁이에 나와 있는 그림들을
오려 가지고 왔고 , 어떤 것은 사진도 찍어 와서 보여줬다.
해외 여행의 기회하고는 멀리 떨어진 분야에서 일 하고 있는 동생이
내 깐에는 많이 안쓰러워서 그랬었다. 체구는 100 Kg 에 육박하는 거구이나
적어도 나의 눈에 보이는 내 동생은 항상 연약하고, 항상 무엇인가 부족하게
살아만 온, 언제나 나의 연민을 필요로 하는 존재 이었었기에 말이다
그 후로도 사정은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내 동생은 해외 여행의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동생 생각은 그런 식으로 오랜 세월 계속 되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동생이
불쌍해서 혼자서 눈물을 많이 훔쳤다. 이렇듯 신비하고 기가 막히는 구경을
동생은 하지 못해 나는 애가 많이 탔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동생은 나의 설명을 듣고, 그런 류 의 설명조차 생생하게 들을 수 없는 제 친구의
더 안쓰런 사람들에게 나의 경험담을 전달해 주고 있었나 보다.
" 헤 ! 웃기구 있네, 우리 성( 형 )이 그러는데... " 하면서 말이다.
나의 이런 형태의 동생 생각에 어려움이 있었다면,
어떤 물리적인 것이나 건축물 등 , 보여주고 설명해 주는 것은 그런데로 괜찮으나,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들은 가지고 와서 보여줄 수 가 없다는 사실이었고
그럴 때면 나는 으래껏, 너도 한번 나중에 가봐, 정말 굉장하다니까 !
라고 말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 들 중 하나가 예를 들면,
어쩌다 운좋게 맞닥뜨린 그곳 외국 현지의 고유 전통적인
축제 분위기, 이건 어떻다고 비교 대상이 없어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나의 부족한 언어 묘사 능력도 문제지만, 나랑 같이 자란 호남평야 시골 태생 동생의
상상력도 너무나 빤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는, 특히 내가 좋아하는 축구인데, 외국 현지에서 접해본 그곳 클럽 축구의
분위기는 나의 상상을 완전히 뛰어 넘고도 남았다. 단순히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팀의
경기가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도시 전체가 축제 속으로 빠져들고, 자기가 지지하는
클럽 팀의 원정 경기 응원을 위해 클럽 깃발을 꽂고, 자기 차량을 몰고 , 비싼
휘발유를 때며 미친 듯이 달려가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그 당시 외국 사람들이 만끽하는 일상 속 삶의 자유는
우리의 숨통을 죄는 남북 대치의 전쟁 공포와는 판이하게 다른
축복 받은 그곳 외국 사람들만의 전유물 이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설명 해 주어야 할까 ?
그저, 너도 다음에 한번 가봐, 가보면 알아 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적어도 나의 눈에 그들은 진정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그 전형으로 보였고,
그 분위기에 잠깐 젖어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선택받은 사람인 듯 싶었다.
그 분위기를 동생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 나는 눈물을 훔치곤 하면서 말이다.
축제를 통한 삶의 여유. 그 축제로 즐거움을 만들고 이야기꽃을 피워 가는 그런 사회...
코쟁이들은 정말 대단했고 복이 많은 사람들로 비춰졌다
실재로 그네들은 그랬다. 우리는 아직 배가 고프고 반공이 국시의 제일이던 그때 말이다
그런데, 그 후로 불과 20 여 년이 지난 금년 , 지난달,
기적이 일어났다. 나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에서...
내가 지금껏 평생을 보아오며 부러워한 그 일들이 내 두 눈앞에서 일어났다
나는 우리가 한 골, 두 골을 넣고 못 넣고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8 강, 4 강 진입을 하고 못하고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우리는 이번 월드컵을 즐겼다는 사실이다.
남녀노소, 온 국민이 최고의 엑스터시를 맛보았다는 것이다
경기 당일, 그 시간 그 게임을 그 장소에서, 혹은 그 장소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제 3 의 장소에서 즐겼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느 사이 이런 위치에 와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내 동생에게 설명하지 못해 생략해온 그런 상황이 나의 사랑스런 조국
대한민국 안 마당에서 벌어져 나의 빈약한 설명이 필요치 않고,
내 동생은 개인의 자유가 주는 무한의 아름다움과
그것들의 극대화가 꽃 필 때의 그 화려함을 스스로 맛보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신세대는 결코 상상해 보지 못한 그 자유,
혁명 공약을 외우고 , 우리 식 유신을 강요당하며 , 파출소 입구마다 펄럭이던
정의 사회 구현의 구두선을 매일 보아야 했던 우리의 참담한 시절에 그렇게 갈구하던
그 자유와 그것들의 우월성이 지천에 널부러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이미 매스컴에서 수 백 번도 더 떠들어서
내가 다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나는 대 - 한민국 !!! !! 의 4 강 진입 위업도 위업 이러니와
그 주변 분위기에 감격해서 울고 또 울었다.
내 평생, 외국을 떠돌아다니며 부러움 가득히 보아온 남의 나라 잔치를
우리도 우리 안 마당에서 한판 거나하게 펼쳤으니,
그것도 세계인 모두가 놀래 자빠질 정도로 훌룡하게 말이다.
코쟁이들 한마디에 일희 일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한결 같이 말했다.
" 한국을 본받자 ! 붉은 악마를 본 받자 ! 한국을 다시 보자 ! 다시 보러 가자 ! "
............
어제, 오랜만에 내 동생이 전화를 했다.
" 성 ! 점심 약속 없으면 나 가서 같이 먹어도 돼 ? 성 ?? "
그러고서 한시간도 채 안되어 동생은 내 사무실에 들어섰다.
내가 명명한 우리 사무실 입구의 골목길, " 히딩크 고샅 "을 걸어서
그 육중한 체구를 끌고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의 흘러내리는 땀을 딲으며
내 동생이 찾아 왔다.
송 종국이 어떻고, 이 천수가 어떻고, 홍명보가 어떻고 하며
우리의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가 대표 축구 선수들의 최신 뉴스를 서로 한 바탕
훑고 지나가고 ,
내 사무실에 걸린 태극기와 네델란드 국기에 대해서도 서로 한 마디씩 하며
함박 웃음을 터트리고 나서,
나는 내 동생에게 말했다.
이제 딴일 없으면, 무얼 보러 외국에 나갈 필요가 없게 됐다.
우리가 주인이고,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세계의 본보기이고
우리의 잣대가 바로 세계가 마땅히 재어 보고 따라야 할 표본이다.
백기완 선생이 월드컵 선수 숙소에 초청 강사로 가서 히딩크 앉혀 놓고
그랬다 잖니, " 코쟁이덜 잘 먹어 키가 커서 그렇지, 우리가 밀어붙이면
까짓거 안될 것 없다고.. 우리 대한민국, 우리 민족이 최고라고.. "
우리가 요번에 얼마나 장한 일을 했는고 하니,
그리고 우리가 요번에 얼마나 신이 나서 우리 자신을 즐겼는고 하니,
내가 아는 어느 초로의 여성 이야기를 들어볼래 ?
당 58 세 여성. 딸 둘이 이미 출가했고
손자를 보았으며,
부군은 정년 퇴직한 공무원. 현 거주지는 서울 구로구 오류동.
이 분은 TV로 한국 경기를 빠짐없이 보았단다.
감격으로 눈물도 훔치고, 긴장 초조감으로 가슴도 쓸어 내리고 하면서...
한국의 마지막 경기가 있는 날,
이 분은 생각했단다.
광화문 앞의 붉은 악마 현장에 꼭 가보고 싶다고..
어쩌면 남은 생애 결코 다시 오지 않을 신나는 우리 역사의 그 현장에,
자유가 충만한 젊음의 용광로 바로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지난 생애 그 동안의
굴종과 억압의 굴레를 보상받고 싶었단다.
그리고 오류동 집을 나와 전철을 타고 한 시간만에 광화문에 도착,
붉은 악마 용광로 속으로 당 58 세, 여성, 손자를 둔 할머니의 몸을 구겨 넣었단다.
햇볕은 얼마나 따겁고, 철푸덕 앉은 아스팔트는 얼마나 뜨거웁고,
땅 바닥에 쪼그려 앉은 몸뚱이는 얼마나 불편했겠니 ?
쉴사이 없이 질러대는 대- 한민국과 오 ! 필승 꼬레아의 연호 !!!
서너 시간의 엑스터시 속에 몸을 맡겨 생애 최대의 희열을 맛본 그 할머니는
붉은 악마 인파 속을 살며시 빠져 나와 , 질러 대는 함성으로 전화가 불가능하여,
집에 있는 남편, 할아버지에게 손 전화를 했단다.
여보, 영감 ! 빨리 전철 타고 이곳으로 나오시라고...
지금 이곳은 천국이요 ! 우리 세대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
남편 할아버지는 사양했단다. 그냥 집에서 TV로 보겠다고..
그러자 아내 할머니는 전철을 타고 광화문에서 오류동 집으로 득달같이 달려와
다시 같이 가자고 설득 했단다. 빨리 가자고, 조금 있으면 경기 시작이라고..
당신은 지금 그곳 그 분위기를 모르고 있다고... 얼마나 신나고 좋은지...
남편 할아버지는 고집을 꺽지 않고 그냥 집에서 TV를 보겠다고 했단다.
아내 할머니는 그럼 할 수 없다. 나 혼자라도 다시 광화문에 가서 붉은 악마와
함께 보겠다 라고 말하고 혼자서 다시 한 시간에 걸쳐 전철을 타고 광화문으로 갔었단다
그리고 다시 신나는 자유, 우리 민족의 축제,
끝없는 자기 희열을 유감없이 만끽했단다.
당 58 세, 손자를 둔 할머니가 말이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을 과감히 내 던질 수 있는,
인간이 인간답게 서로 어우리고 보듬으며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내 조국,
대한민국의 꽃방석에 털썩 몸을 내 던지고
감격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며 울었단다.
그 할머니의 두 손가락은 하늘을 향해, 끝없는 인간의 자유를 향해,
그렇게도 신날 수 없는 무한의 희열을 향해
우렁찬 대- 한민국 함성과 함께 뻗치고 또 뻗쳤단다.
다시 광화문에 도착 했을때 경기는 이미 전반전이 끝났지만 상관없었단다
생각 해 보라 ! 저게 만일 내가 해외 여행 중에 맞닥뜨린 광경이었다면
내가 어떻게 저 할머니의 심정을 내 동생, 너에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
안 그러느냐, 나의 사랑스런 내 동생아 !
내가 수많은 날들 해외를 돌아다니다가 맞닥뜨린
코쟁이들의 저런 축제가 우리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외계의 일로만 알았었는데, 그게 바로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다니,
동생아 ! 잘 보았느냐 ? 두 눈 똑똑히 뜨고 보았느냐 !
저거이 내가 그토록 너에게 보여 주지 못해 안달이었던
바로 그 장면이다. 지구상에서 오직 축복 받은 민족만 누릴 수 있는
선택된 순간들이다, 동생아 !
자, 우리 밥 먹으러 갈까 ?
어째, 요사이 좀 꺼칠해 보인다, 동생아 !
우리 뭐 먹으러 갈까 ?
서울
고덕 달림이
박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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