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후기] 원수는 탄천교에서 만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형성 작성일02-02-18 16:35 조회675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일요일 새벽, 눈을 뜬다.
이틀전부터 새로 시작한 하체 근력운동 탓에 종아리가 약간 당기고 허벅지의 묵직한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걱정스럽다. 오늘은 서울마라톤 풀코스모임이 있는 날, 대망의 동아마라톤대회를 앞두고 마지막 풀코스 지속주를 달리는 날이다. 오늘 레이스는 상당히 중요하다. 최선을 다해 결과를 얻고, 그 결과에 따라 동아마라톤에서의 목표기록과 5km 랩타임 등을 설정해야하기 때문이다.
거실로 나가 TV를 켠다.
동계올림픽, 이규혁 선수가 1000m 스피드 스케이팅에 출전하고 있다.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이규혁은 참 멋진 친구다. 전문가들의 평에 의하면... 일찌감치 쇼트트랙에 뛰어들었다면 기량으로 보아 진작에 올림픽 메달 몇개쯤은 땄을 선수인데 "정통"이라 할 수 있는 스피드 스케이팅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다고 쇼트트랙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이규혁까지만 보고 집을 나선다. 6시 40분.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고, 반달장소에 도착했을 무렵 이미 스트레칭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초 윈드자켓을 입고 뛸 생각으로 앞뒤에 이름표까지 붙여놓았었는데, 다른 분들 복장이 생각보다 가벼운 걸 보고 마음이 바뀐다. 쿨맥스 긴팔에 서울마라톤 유니폼을 입기로 했다. 바지는? 좀 남사시럽지만 타이즈만 입는다.
불빛이 밝게 빛나는 곳.
돌쇠 아니, 김진사 어른이 인터뷰를 하고 계신다. 평소와 달리 근엄하신 모습이다. 나는 오늘 진사어른을 피해다녀야 한다. 며칠전 송장군님과 진사어른이 치신 남산번달에 부상을 핑계로 겁도 없이 불참했기 때문. 김진사님에게 마이크를 대며 방긋 웃고있는 여자 리포터가 제법 이쁘다. 쩝쩝~
총성과 함께 출발.
런너스클럽 회원이자 서울마라톤 스탭인 김명호님과 함께 달린다. 서울마라톤대회 준비 때문에 사무실에서 밤을 지샜다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자원봉사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대회주최는 그렇지가 않다. 나도 언젠가는 대회주최를 위해 봉사해야할텐데, 언젠가는... 마음만 늘 "언젠가는"이다.
오늘의 목표는 *시간 55분.
하지만 스피드가 생각만큼 나지 않는게 처음부터 순조롭지가 못하다. 복숭아갈림길 부근의 5km지점부터 여의도까지... 5km 랩타임은 예정기록에서 30초 가까이 초과하고 있다. 이후 5km도 역시 마찬가지. 익숙해지지 않은 근력운동 여파인 듯 싶다. 몸이 풀리기 시작한 것은 반달지점을 지나 15km를 넘어서면서 부터.
올림픽대교 밑, 대략 25km 지점, 박**님이 저 앞에 달리고 있다.
내가 마라톤에 본격 입문하던 99년초, 이분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분이었다. 98년 제1회 서울마라톤대회 풀코스에서 2시간 35분으로 우승을 하셨던 아마추어 최강자. 가끔 반달에 오셔서 1시간 10분대 초반에 하프를 끊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던 분이다. 풀코스 2시간 35분이면 요즘도 왠만한 마스터즈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엄청난 기록이다. 하지만 이후 부상 때문에...
"죄송합니다. 먼저 가겠습니다"
의례적인 듯한 인사이지만 이 분을 앞질러 가는데 상당한 부담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서 부상의 늪에서 벗어나셔서 예전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다시 보여주시길 바랄 뿐이다.
그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달리기에 방해가 될 정도의 비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발에 물이 차기 시작한다. 나는 신발에 물이 들어오면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다. 일요일마다 했었던 지구주 덕분인지 1월 마지막주 풀코스에 비하면 막판에도 힘이 남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물집 때문에 정말 고통스럽다. 시계를 자꾸 본다. 마음이 급해진다. 하지만 다리는 마음만큼 움직여주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 탄천교.
원수는 탄천교에서 만난다. 달리다말고 낚시꾼과 담소(?)를 나누고 계시던 김진사 어른과 맞닥뜨린 것. 어제 레이스의 최대 위기... 그러나 피할 길이 없는 이곳은 다리 위. "아프다고 남산도 안나온 놈이... 오늘 잘 뛰면 죽어!" 추상같은 그의 한마디. 움찔하는 나를 향한 그의 질타는 계속된다. "천천히 뛰어, 이게 시합이냐?" 그리곤 찰싹~ 등허리가 얼얼하다. 얻어 맞으면서 마라톤하기는 또 처음이다. 위기탈출은 삼십육계뿐... "나 잡아봐라~"
지금 내 기록대를 벗어나고 싶은 데는 이유가 있다.
sub-3든, sub-4든... 2시간 59분이든, 3시간 59분이든 흔히 sub 뭐라고 불리는 시간대에 아슬아슬하게 걸리는 사람들은 레이스 막판이 너무 고통스럽다. 예를 들어 2시간 50분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막판에 좀 쳐지더라도 2시간 55분 내외에는 들어갈 수 있는데, 2시간 59분, 3시간 59분에 턱걸이하는 사람들은 막판에 조금만 쳐지면 sub-3, sub-4를 할 수 없다. 단 몇분이지만 기분학상의 상당한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작년 11월 부산마라톤대회에서는 sub 얼마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엄청난 고문을 당한 끝에 *시간 1분에 들어오는 쓴잔을 마셨다. 어제도 마찬가지, 부산마라톤에서의 기록보다 몇초 빠른 기록. 막판 아둥바둥하면서... 뛸 때마다 마지막이 너무 괴롭다. 진짜로 이 시간대를 벗어나고 싶다. 벗어나고파..
목욕, 뒷풀이를 가려다가 빨랑 집에 와서 애를 봐달라는 집사람의 전화를 받고, 스트레칭도 제대로 못한 채 송구스런 마음에 몇분께만 조용히 인사드리고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집에서 애 보며 쇼트트랙 보다 한참 열받다. 중국선수 좀 심하다. 말로해서 될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내가 한국감독이면... 애들 푼다.
낮잠을 잤는데... 꿈속에서 내가 쇼트트랙 선수였다. 내가 송장군님을 제치려다 김진사 어른과 같이 넘어졌다. 같이 펜스에 부딪히곤 진사어른께 얻어터지다 꿈에서 깼다. 시인(詩人)과 폭력... 잘 매치가 되지 않는다. 집사람이 악몽 꾸었냐고 묻는다. 악몽이라... 그래, 악몽이었다.
동아마라톤 4주전의 일요일, 그렇게 갔다.
59분 이봉주 / 김형성.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