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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광장

누가 자신 있게 李舜臣을 聖雄이라 칭송하고 元均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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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강하 작성일02-02-09 15:06 조회6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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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신 있게 李舜臣을 聖雄이라 칭송하고 元均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약 20여 년 前 일이다.
그 당시 나는 남산에 있는 국립 중앙 도서관으로 공부하러 다녔다.
(지금은 서초동의 현대식 건물로 이전한 것으로 아는데 한번도 가보지는 못했다.)
기술고시에 응시하기 위해서였는데 고시원에 갈 형편은 못되고 하여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허위허위 남산 길을 오르면
학생들이 벌써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이삼백 미터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당시는 중동특수(中東特需)가 단절되어 지금보다도 더 취직이 어려워
고시(考試)등 공무원 시험이 최고의 인기였다.
그 후 그렇게, 그렇게 공부하여 1차는 몇 번 되고
2차에서 번번이 떨어져 국영기업체에 취직하고 말았지만...

그 때 거기서 만나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 중에는 지금은 내가 넘볼 수 없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사시, 행시, 외시, 기시 공부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 모두 다 심산유곡의 절간이나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그 때 알았다.
각설하고...
이따금 머리를 식히려 가끔은 창 밖을 내다보곤 하였는데
봄이면 남산 식물원 주위로 온갖 기화요초(琪花瑤草)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가을이면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우러진 창 밖의 풍경은
고즈넉한 공원 숲 사이사이 쌍쌍이 거니는 데이트 족속들과 더불어
그 당시 20대의 피끓는 나에겐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창 밖의 풍경은
고요한 평정 속에서 공부에 몰두하여야할 이십대의 가슴을
쥐어흔들어 놓기에 충분 조건 이상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시작하려는 이야기는
미치도록 아름다운 창 밖의 풍경을 대신하여
바로 맞은 편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 광장에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이라
각인(刻印)된 선돌(立石)에 눈길을 떨구곤 하던 시절, 그러니까 20여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아예 창 밖을 내다보지 않고
틈틈이 자유 열람실에 들어가 책을 보게 되었는데,
참 거기에는 일반 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책이 엄청 많았다.
나는 어려서 증조부의 영향으로 그래도 한문에는 조금 자신 있었기에
희귀한 한문 서적도 그 때 거기서 참 많이 보았다.

그 당시 중앙도서관 사서주임이 미모(美貌)의 노처녀였는데
젊은 사람이 한문 서적을 빌려보는 것을 보고 호기심 있게 생각했나 보다.
나중에는 그녀와 친밀하게 이야기도하고 소장도서 중 희귀도서에 대한 정보도 주고
절대 대출되지 않는 책(所藏本)까지 마구 빌려주는 것이었다.(여기까지만 이었음)
그녀 덕분에 당시에는 금기시(禁忌時)된
납북.월북작가들의 작품도 그 때 거기서 참 많이 보았었다.
金起林(片石村), 韓雪野, 李箕英, 鄭芝鎔, 白石, 安含老, 林和, 李泰俊...
지금은 다들 웬만큼 알지만 당시에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운 작가들이었다.(金○○로 표현)
徐廷柱(未堂), 李光洙, 柳致鎭, 金東煥, 朱耀翰등이 친일 부역작가들이요,
오히려 납북.월북작가들이 민족의 자존(自尊)을 지킨 작가들이란 사실도 그 때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시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그런 책들을 참 많이도 섭렵하던 어느 날,
나는 우리 羅州 羅氏의 기원(起源)에 관하여 관심을 갖고 서적을 뒤지던 중,
[조선 왕조 실록]을 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실록이 완역되지 않고 번역 작업 중이었다.)
거기에 조상님 중의 한 분이 상술(詳述)되어 있어 알아 볼 일이 있었던 것이다.

주지(主知)하다 시피 [조선 왕조 실록]은 단일 왕가의 역사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기록이요, 그 정확성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당대의 임금은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없었을 뿐더러
실록의 기본 자료인 사초(史草)를 쓰는 사관은 임금이 한밤중 소변을 보러 나갈 때도 쫓아 다녔다고 한다.
그러한 어머 어마한 실록 복사본을 뒤지던 중 어느 날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놀라운 사실이란...
1604년(선조37년) [선조실록] 6월25일자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을 보니
문신(文臣)으로는 이항복과 정곤수가 호성(扈聖) 일등공신으로,
무신(武臣)으로는 이순신·권율·원균이 선무(宣武) 일등공신으로 명기돼 있는 게 아닌가?
지금은 사극(史劇) 조선왕조오백년 "임진왜란"편이나 다큐 "역사 스페셜"등에 소개되어
[이순신=영웅, 성웅], [원균=간신, 역적]의 等式을 믿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그 당시는 군부 통치 시절로 노산 이 은상 편저 "성웅 이순신"과
교과서를 통하여 [이순신=성웅], [원균=역적]으로 알고 자란 나에겐
元均이 일등공신이었다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지금도 [원균=역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꽤 많이 있는 것 같다.

임진왜란의 영웅이자 충신으로 평가돼온 이순신과
일반적으로 ‘역적'으로 알려진 원균이
4백년전 당시에 똑같이 일등공신으로 책봉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필연적으로 논공행상이 있게 마련이고
그 논공행상은 당시 전쟁을 직접 겪은 선조 이하 중앙 고위 관료들에 의하여 결정된 사안이었을 것인데...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조상님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나의 원균에 대한 오랜 기간의 추적 작업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조사에 의하면 이렇다.


<바쁘신 분을 위해 요약분을 올림, 자세한 정황을 알고 싶은 분은 아래 답글 [주석]을 보시압>

① 원균은 간신도 역적도 아니고 조선의 용맹한 무장일 뿐이다.
그렇다고 이순신이 간신이요 역적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둘 다 똑같이 우리 후손들이 존경하여 마지아니할 자랑스런 선조 들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순신을 미화하고 영웅시하기 위하여 단지 원균이 희생양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런 엄청난 오해는 왜 생겼을까?
그렇다면 그 증거는?

② 무엇보다도 선조의 논공행상이 이를 말해준다.
③ 원균이 비겁한 장수라는 데는 수정선조실록도 한 몫 하였다.
④ 원균을 폄하 시키는 데는 분단이란 상황하의 군사문화도 한 몫하였다.
⑤ 원균이 용맹한 무장이라는데 그 증거는?
⑥ 그렇게 합동작전으로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그들이 멀어지게된 원인은?
⑦ 신출귀몰한 선조의 용병술
⑧ 갈등과 불화는 애증을 낳고... 죽음을 낳고...

⑨ 조선의 창과 방패
요컨대 임진왜란의 진행과정에서 이순신의 활약이 뛰어났음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훌륭한 인품과 탁월한 전략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음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성인(聖人)이나 신인(神人)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인간적인 면이나 단점이 있었던 것이다.
원균에 대해서도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는 있지만
그를 역적이나 졸장부로 치부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도 전란 중에 아들 원사웅(元士雄)을 잃었고
그 자신마저 전사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도 나름대로 무장으로서는 용감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들 두사람은 곧 한 명은 조선의 방패요, 또 한 명은 조선의 창이었으니
조선의 창과 방패가 서로 힘을 합쳤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고,
이 창과 방패가 어우러져 기나긴 전쟁을 마감하게 된 공로에 관해
후세 사람들은 원균에 대한 일방적 매도는 불필요하다 할 것이다.
실로 한 명은 조선의 창이요 한 명은 조선의 방패로써
한민족의 해상 전투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불굴의 영웅들인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이렇듯 한사람의 영웅을 미화하기 위하여,
혹은 어느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한사람을 매도한 예는 비일비재하다.
진훤(견훤)과 왕건, 묘청과 김부식, 성삼문과 신숙주...

그 뿐인가?
석가세존을 끝까지 괴롭혔다고 알려진 "데바닷다(提波達多)"라는 인물도
사실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수행방법을 들고나온 석가세존에 반대하여
검소하고 전통적 수행방법을 고집한 보수적인 인물에 불과할 뿐이요,
모함이나 하는 소인배가 아니라는 설이 유력하고

예수님을 은 30냥에 유대인 제사장에 팔아 넘긴 "가롯 유다(Judas Iscariot)"도
사실은 예수의 원(願)에 의하여 예수의 소재지를 알려준 신실한 제자에 다름 아니다는 설이 유력하다.
집정관 본디오 빌라도의 병사가 체포하러 오기까지 충분히 피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예수님은 도피하지 않고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 졌다는 것을 그 유력한 증거로 들고 있다.
따라서 가롯 유다는 배반자도 이단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성서의 해석은 참으로 무궁무진하지만
최근에는 정경(正經, Canon)이외의 외경(外經, Apocrypha)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이야기는 앞으로 올라고자하는 "꿈 이야기"에 약간 등장하겠지만...

그렇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석가세존도, 공자도, 예수도 한결같이 중용(中庸)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냉전시대(冷戰時代)의 산물(産物)인 "모" 아니면 "도"의
흑백논리에 대하여만 사고해오지 않았는가? 반성해볼 일이다.
중도의 길을 걷는 사람을 회색분자로 치부해 오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성현들은 한결같이
사랑과 자비와 효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최근 "꿈 이야기"를 쓰다보니(잘못 건드렸음)
약간의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나무만 보지말고 숲을 보자는 관점에서 보면
석가와 공자와 예수가 어찌 이리도 다같이 똑같은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인생 여정 구비 구비가 어찌 이리도 서로 유사한가?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성경(The Bible)과 불경(佛經)의 내용과 결집(結集)과정이 어찌 이리도 유사한가?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우리는 위대한 달림이(marathoner)가 되기 위해 여기 "만남의 광장"에서 만나는 게 아니다.
서로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알아보려고 만나는 게 아니다.
니캉, 내캉 아등바등 논쟁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만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장점이 보이면 취하여 자기 것이 되게 하고, 그리하여 자기의 인격을 더더욱 함양시키고
단점이 보이면 잘못됐다고 섣불리 예단하지 말고, 너무 완곡하게 나무라지 말고,
내 생각에는 이러함이 어떠 하오리까? 정도의 정중한 표현으로 의사표현을 하되
그래도 아니라면 눈감고 귀막고 코막고 달리면 그만이다.
절대로 인신공격이나 원색적 비난은 하지 말자.
절대로 즉흥적이고 즉물적으로 대응치 말자.
그리하면 그것은 곧 내가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과 같음을 명심하자.

왜 달리는가? 왜 이 만남의 광장에 글을 올리는가?
참으로 숱한 강호제현이 이 문제에 대하여 토로하여 왔지만
달리기의 동인(動因)이 각자 다르듯이 그 해석은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달리기에 대한 정보나 교환하거나, 기록을 단축시키고,
세 시간 이내 달리기(sub-3)를 하기 위해서도,
100km이상 먼 거리를 달리기 위해서도,
전구간(풀코스)을 100회 이상 달리기 위한 것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닐 것이다.
기록을 단축한다고 올림픽에 나갈 것인가? 아니면 누가 상(賞)이라도 준다던가?
그보다는 풀뿌리들의 아름다운 달리기 덕목(德目)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서로 기쁜 일이 있으면 축하해주고, 슬픈 일이 있으면 같이 나누고,
새로운 달리기지기를 만나고, 그 만남을 아름답게 이어가고,
삶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즐거운 달리기 생활에 대하여 이야기함에 더 큰 가치를 두어야하지 않을까?

<2002/2/6 이름 없는 풀뿌리 나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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