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며 생각하며-자명종과 새벽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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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건수 작성일00-12-05 11:29 조회79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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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종과 새벽 달리기
김 건 수
새벽 4시면 문간방에서 세 들어 사는 할머니가 나를 부른다. 그 목소리는 찢어질 듯하게 졸리움을 두들겨 패는 자명종의 그러한 소리가 아니다. "...건수야 일어나라 힘들지..." 마치 어머니와 같이 부드럽게 나를 불러 깨운다. 만일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나를 깨운다면 아마 짜증을 내었겠지. " ...저 5분만 더 잘 깨요..."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면 우리집에는 자명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70년대 우리네 모습은 대략 그랬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자명종조차 우리 생활비로 충당하기에는 삶의 무게가 허락하지 않았다. 새벽일을 나가는 내가 대견스러운지 할머니는 날마다 나를 깨워 주시는 것이다. 그의 자상한 명령은 자명종의 파열음보다 깊고 강했고,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학비라도 벌어 볼 요량으로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신문배달을 시작한다. 묘한 인연이었을까. 그 때 배달한 신문이 한국일보와 일간스포츠였는데, 지금 나는 한국일보 기자를 거쳐 일간스포츠 사진부장으로 일하고 있으니...
우리 많은 형제들의 생활 공간은 방이 3개 달린 19평 짜리 손바닥만한 한옥이었다. 사글세로 방 한 칸을 월세를 주고 그 삯으로 삶을 꾸려가야 하고, 누나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니, 나의 공간은 자연스레 다락방에 또아리를 틀 수밖에 없었다. 전통 한옥의 다락이란 곳을 아는 이는 다 알겠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정말로 불편하다. 여름이면 검은 기왓장으로 스며드는 열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한낮의 내부 온도는 거의 40도에 육박하고, 겨울에는 창호지 한 장이 유일한 외부와의 차단막이어서 항시 영하 십 여도의 한기가 있는 곳이 다락이었다. 그러나 그 곳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안식처이고 도피처였다. 고입시험 1차 낙방이란 처참함을 견뎌내야 했고, 어린 나이에 도스또옙스키를 읽어내면서 라스니에꼬르꼬프의 고뇌를 되새기며 추위를 잊어야만 했던 곳이 바로 다락방이었다. 좋은 점도 있었다. 정말 돈이 없어서 미술시간의 200원 짜리 고무판을 준비하지 못해 선생님에게 허벅지가 피멍이 들도록 얻어맞고, 그 억울함에 일찍 세상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며 형제 몰래 끊임없이 눈물을 쏟을 수 있는 은밀한 나만의 장소였으니까.
다락방 생활 3년이 지난 시점에 새벽일을 시작하게 된다. 얼마전 대전의 박 신석 님의 글을 인터넷 마라톤 사이트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분은 마라톤을 위해서 새벽 달리기를 겸한 신문 배달을 한다는 것이다. 참 고매한 어른이시란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 일석이조로 배달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당시는 신문 배달이라 함은 가난을 힘들어하는 중고생들의 유일한 아르바이트였다. 그 외에는 별반 시간직업으로서 대안이 없었다.
정확히 새벽 4시15분이면 나는 아르바이트를 위해 첫 발을 내 디뎌야만 한다. 몰려오는 졸음을 참아내기 위해서는 뛸 수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을지로 보급소까지는 15분은 달려야 한다. 그 때는 내가 엄청 달렸다고 생각했다. 삽지(광고 전단이나 신문 간지를 끼워 넣는 작업)를 마치면 곧바로 배달에 들어가야 한다. 나의 구역은 명동, 그 곳을 향해 또 10여분을 달리고 고층빌딩 사무실 홋수를 확인하며 배달을 마치면 7시, 온 몸에 땀이 흥건하다. 송글송글 솟는 땀방울은 고단함을 풀어주는 미약이다. 배달은 힘들었지만, 명동성당에는 항상 장엄한 여명이 걸려있었고, 그 곳에서 은은히 퍼지는 새벽 종소리에 삼라만상이 깨어나는 것을 볼 수 있는 기쁨도 나의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 때면 사람들의 동선이 활발해진다. 그러면 나는 오히려 느릿한 걸음으로 새벽의 숨가쁨을 고른다. 이것이 보통의 신문배달 과정이다.
배달을 한 지 보름이 지났을까, 여느 때와 같이 보급소에 출근했는데, 총무(신문 배달하는 학생을 관리하고 수금과 확장을 하는 사람)가 나를 불러 세운다. 왜 날마다 교복을 입고 다니냐는 것이다. 다른 학생들 보다 좋은 학교(?)를 다니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가 보다. 나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이랬다. 나에게 있어서 교복은 남다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새벽에 출근할 때의 출근복이었고, 배달할 때의 작업복이었으며. 등교할 때는 교복, 아주 가끔 참석하는 친척 잔치집 행사에서는 야회복이었다. 대체할 한 벌의 옷의 여유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나의 무명 교복은 남들보다 빨리 달았고 여기저기 꿰맨 자국도 많았다. 덜 성숙한 나는 그 누더기 교복이 내 삶의 주홍글씨같이 느껴졌었다. 그 옷이 창피스러웠다. 왜 나는 남들과 같이 몇 천 원하는 츄리닝이 한 벌도 없는 것일까? 그 사실에 대해 나는 형들과 누나들에게 속으로 원망도 많이 했지만 표현한 적은 없었다. 어린 자존심이 누나들에게 옷을 사달라고 조르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깊은 다짐을 했다. 훗날 나는 멋진 츄리닝을 가져보리라고... 지금 생각하니 참 우습다.
그날도 300부가 넘는 신문을 돌리고 보급소로 돌라가려고 할 때, 뒤에서 나를 부른다. "학생 혹시 신문 남은 게 한 부 있으면 팔 수 있나?" 물론 그날도 교복이었다. 내가 몸을 돌리자. 그 아저씨는 무엇 때문인지 흠짓 놀라는 것 같았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그 때만 하더라도 오 배달이나 착오를 막기 위해서 보급소에서는 신문 몇 부를 더 주곤 했다. 스스럼없이 신문 한 부를 건네주었다. 이제는 정말 서둘러야 한다. 또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런데 갑자기 또다시 나를 부른다. " 학생 얼마인가, 신문 한 부에?" "그냥 보세요", 그런데 나를 계속 붙잡는다. 정말로 나에게는 바쁜 시간인데, 그 이는 돌아서는 나의 모습을 아주 천천히 훓어 읽어 내려간다. 결국은 내 모표에 시선이 집중된다.
그리고 멋적은 미소를 띠고 100원 짜리 동전을 내 손에 쥐어주며 한마디를 건넨다. 의미를 실은 말이었을까? "...열심히 뛰어봐 학생에게 좋은 날이 있을 거야..." 솔직히 그 때 나는 그 의미를 새기기 앞서 손에 쥐어진 100원 짜리 동전만을 생각하였다. 그것은 배달 후 시장기를 넘길 수 있는 충분한 돈이었기에...
70년대에는 신문 한 부의 가격은 5원이었고, 삼립식품에서는 크림빵을 만들었다. 한 개에 10원, 그리고 샤니 케익에서는 달콤한 잼을 넣은 롤빵을 만들었다. 15원이었다. 그날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집으로 뛰어오면서 가게에 들러 삼립빵 3개와 롤빵 한 개를 사 먹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마구 달려온 숨가쁨도 잊은채 배고픔에 빵 몇 조각을 뱃속으로 우겨 넣는 내 모습을 돌이키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나에게 100원을 준 아저씨가 생각이 난다. 참으로 희한한 이를 다 봤다고 생각될 즈음, 그의 눈빛이 뇌리를 스친다. 약간은 슬픈 듯한 눈매로, 나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다보는 모습. 그러나 그 눈빛의 숨은 뒤편에는 잔잔한 애정이 숨어 있었다. 많은 상상을 해 보았다. 그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가 내 고등학교 선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아니라도 그 아저씨가 분명 나의 모습에 대해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침묵의 미소-이것이 내가 마라톤을 하는 요새 생각나는 고교 시절 새벽 달리기에 대한 기억이다. 그 시절에는 달리기를 혐오할 정도로 편파적 삶을 살아야하는 그 고단함에 괴로웠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나만이 가질 수 있었던 소중함이었다. 그 땀방울에 추억이 서려있는 것이다. 그 잊혀진 땀의 기억이 겨울을 앞둔 나에게는 큰 의미로 작용하고있다.
새벽마다 오토바이 소리가 신문배달을 알리는 요새는 고등학생이 배달을 하러 뛰는 것을 볼 수가 없다. 물론 그들에게는 이미 다양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창피하게 생각하는 친구도 없다. 머리도 개성에 맞게 노랑, 초록, 빨강 등 다양하다. 일부러 찢은 바지도 즐겨 입는다. 아이들의 어느 구석에서도 찌듦이 없다. 그들의 모습이 맑아서 오히려 좋다. 세상이 풍족해진 만큼 녀석들에게는 삶의 어두운 그림자를 더 이상 발견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난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어느날 아주 우연하게 새벽 졸음을 견디며 뛰는 학생을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를 만나길 바라진 않는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 풍부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가난과 별도로 스스로만의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모습을 간직한 그런 모습의 젊은 친구를 만나보고 싶을 뿐이다. 그 이유는 왜일까. 옛날과 달라진 나의 모습과 그를 견주어 보려고, 아니면 값싼 동정을 보내기 위하여, 아니다. 만일 그런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그저 맑은 미소를 보내고 싶다. 그의 삶이 어떠하더라도 그가 흘리는 땀과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란 의미를 스스로 느끼길 바라며, 어떠한 삶의 한계도 그 친구가 정직한 걸음이나 뜀으로 차고 나가는 것에 대한 소리 없는 갈채를 보내고, 예전에 내가 누구에게 받았던 그 침묵의 미소를 전달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 우리집에는 스스로 울지 못하는 자명종이 몇 개나 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자명종엔 어느 회사의 상표만 표시되어 있을 뿐, 선반 위에서 하나의 장식품 이상의 의미가 없다. 나의 새벽고단함에는 어린 시절 아랫방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살아있고, 아이들의 아침 잠깸도 아내의 다정스런 목소리로 대치하고 있으니, 자명종은 나름대로 그 의미를 정지한 바늘로 멈춰진 시간의 한 단면을 상징하고 있을 뿐이다.... 참 아내의 목소리는 아름답다, 그리고 사랑이 가득하다. 몇 번을 깨워도 아이들은 5분만, 10분만한다. 참 철없는 녀석들이다. 저 녀석들도 언젠가는 엄마의 목소리를 제 삶의 자명종으로 기억해 내리라. 요즈음 정말로 새벽 달리기가 싫어질 때면 나는 스스로 다락방과 세 들어 살던 할머니의 자상한 목소리를 기억해 내려고 노력해 본다. 그 이름 모를 젊은 아저씨의 미소와 잊을 수 없는 빵의 향기는 나의 얇은 잠을 몰아낸다. 이런 추억은 내가 새벽을 뛰는 데 참 힘이 되는 기억들 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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