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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광장

달리기 퍼포먼스(아주 긴 글 200자 4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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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승기 작성일00-11-28 08:06 조회8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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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프롤로그
♥경제학적 접근
♥자학적 접근
♥약물학적 접근
♥종교적 접근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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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얼마간 달리기를 했다고 해서 난 척 반, 자랑 반으로 달리기를 입에 물고 다니다 보니 짖굳은 친구들의 장난기 어린 많은 물음에 직면한다.
"왜 달리나?"
"왜 사서 고생?"
"그걸 하느니 전에 같이 했던 운동으로 다시 합류하는 것이 어때?"
곤란한 질문이나 냉소적인 물음에는 달리기하기 이전에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들의 우정이 숨겨져 있어 무관심으로 일관하자니 그렇고 잠자코 있자니 알량한 자존심이 또 허락을 않는다.
"자네는 마라톤도 몰라 완전히 마비아그라톤이라니까..."
"내 맘이지 달리고 싶어서..."
"아냐 난 죽으나 사나 이제는 달리기야..."
나름대로 우문에는 우답으로 현문에는 현답으로 답한답시고 내던지다시피 말하지만 뒤가 개운치가 않다. 또 차원 높은 질문에는 아는 척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이 기회에 그동안 달리면서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왔던 물음과 휘니쉬라인에 들어오는 순간 새까맣게 까먹었던 기억들을 되살려 "달리기란 무엇인가?"란 본질적인 문제를 놓고 달리기에 대한 정의를 구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 고통스런 달리기를 왜 한단 말인가?"란 화두를 놓고 수없이 반복됐던 혼란스러움을 일소해서 정신적 청량감 까지도 챙겨보자는 거대한(?)욕심으로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 어설픈 결말이라도 찾아야겠다는 완전히 이기적인 심보로 시작해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하고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어 달리기 명분을 굳건히 할 수 있는 정의, 구구한 설명 없이 한마디로 명쾌한 대답이 될 수 있는 정의, 반론을 용납하지 않는 정의를 찾아내기 위해 머릿속 on-line상에서도 쉼 없는 또 다른 마라톤을 병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42.195가 결코 쉽사리 다가서지 않았듯 시작부터 수월하지가 않다. 휘니쉬아치에 속절없이 걸려있는 전광판의 불빛만큼 멀게만 느껴지니 결말은커녕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미리부터 걱정이다.
때문에 불안한 마음에서 벌써부터 변명을 준비해 본다. 그 답을 손쉽게 찾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앞서간 선배들이 명확히 가르쳐 주지를 않아서 이고, 둘째는 가르쳐 주어도 이해를 못했기 때문이며, 셋째는 스스로 찾고자 하는 노력도 게을리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평생 헤매도 찾을 수 없는 일이던가, 아니면 찾고자 하는 일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던가, 아니면 앞으로도 대포소리에 놀라 남들이 달리면 덩달아 계속해서 달리던가, 선택(?)의 여지는 많다.
그러나 또 다시 그 알량한 자존심이 내버려두지를 않는다. 제법 많은 시간을 고민해 왔던 만큼 이번에도 명쾌한 표현 한마디를 찾고자 조심스럽게, 하지만 줄기차게 또 한번 시도를 해본다.

(경제학적 접근)

그 첫 번째 시도가 경제학적인 접근이다. 거창하게 들릴지 몰라도 말 그대로 이것은 과대포장이다. 경제학 전공은 해본 일도 없지만 누구나 갖출 수 있는 교양수준의 경제상식으로 단지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을 잠시 상기해보는 것을 그렇게 표현해 본 것에 불과하다. 달리기의 효용변화를 추적해 봄으로써 한마디로 표현 할 수 있는 정의가 도출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이 법칙을 떠올려 본 것이다. 달리기에도 과연 이 법칙이 적용 가능할까 아닐까를 따지는 문제는 다음 다음 문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5km, 10km, 하프, 풀코스, 울트라 등의 순서를 밟아 달리는 모습을 지켜 볼 수 있다. 하프나 풀코스로 직진하는 예외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순서대로의 연습과정을 거쳐 가능할 것이다.
왜 그러는 것일까?
체감되는 달리기의 맛을 늘어난 거리로 보상받으려는 것인가?
아니면 점증되는 달리기의 맛을 거리를 늘려 가면서 욕심껏 즐기기 위해서일까?
어느 경우이든 비슷하게는 느껴지지만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일인지는 알 수가 없다.
순전히 개인적인 경우이지만 체중 104kg으로 미사리 조정경기장을 두바퀴(약 10km)돌았을때의 '성취감 그 맛'과 춘천에서 처음으로 하프를 완주하고 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의 '성취감 그 맛'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후 줄곧 하프만을 고집하다 올해야 비로서 공식적인 풀코스 완주기록을 갖게 됐지만 맛으로 따진다면 그 이전에 느꼈던 맛에는 다가서지 못한다. 맛은커녕 실전같은 몇차례의 연습을 거쳤어도 늘어난 거리만큼 배가된 극심한 고통으로 풀코스 이후는 "완전히 자학"이라고까지 단정하고 포기할까도 했다. 또 울트라는 달려보지를 못했지만 과거 두 번의 태백산맥 종주경험으로 그 맛을 어렴풋이 짐작해 본다.
그러나 나름대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 사실이지만 비록 풀코스를 달린 후의 맛이 그전의 10km나 하프만 못하다해도 완주후의 '성취감 그 맛'에 덧붙여 청소년기 이후 슬며서 뒷전으로 모습을 숨겼던 '도전정신'과 '모험심'이 또 다시 꿈틀대기 시작해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라토너들의 겸손한 마음도 "도전과 모험"이라는 줄기찬 고행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막연히 미루어 짐작을 해본다. 마스터스에서 달린다는 그 자체가 소중할 뿐, 짧은 거리, 느리게 뛰는 사람들을 비하시키거나 얕잡아 보는 경우는 농담이라도 이제까지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있다 해도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달리기의 불변효용과 절대가치인 '성취감 그 맛'에 덧붙여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는 달리기로 인해 자극돼 꿈틀대는 도전정신, 모험심, 그리고 아직도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어떤 맛을 통틀어 달리기의 '참 맛'이라고 가정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심취하는 달리기의 그 참 맛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숙제는 간단히 끝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쯤 되면 휘니쉬라인의 전광판 불빛이 어슴츠레나마 보일 법도 한데 아직도 가물거린다.
오히려 "참 맛"에 대한 성급한 욕심 때문에 명쾌한 정의는커녕 늘어난 거리에 비례해서 배증된 극심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학"이라는 혹까지 붙이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경제학적인 접근이 실패로 끝났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며 "참 맛"으로 그 범위를 좁히는 데는 일조를 했고 큰 진전이 아닐 수 없다.

(자학적 접근)

혹이 붙었으니 비록 머릿속 온라인일지라해도 장거리 달리기에서는 짐이 된다. 때문에 혹부터 떼어 내고자 자학적 접근을 다음으로 시도한다. 이 또한 과대포장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또 혹자는 경건한 달리기에 자학이라는 말을 들먹여 가면서 그 의미를 찾으려하는 자체가 자학이라고 핀잔을 줄지 모르지만 그래도 도리없다.
그러나 마라톤의 기원, 즉 필리피데스의 죽음이 말해주듯 마라톤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자학이라는 꼬리를 질기게 달고 다니기 때문에 이를 결단코 잘라내야만 하며 이를 통해 달리기의 참모습을 찾아야 한다.
거울의 허상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듯 달리기의 "참 맛"에 대칭되는 부분에 나타나는 허상중에는 자학도 한 모습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거울 속에 나타난 자학의 모습을 비추어봄으로써 달리기의 진면목을 규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갖는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의 결여로 자학과 아닌 것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 노력은 피하기로 한다. 다만 달리면서 숨이 턱에 차고 다리가 천근 만근 무거워오면 떠올려지는 말들, "이번만 달리면 죽어도 달리나 보자", "나는 몇km가 좋은데 그이상은 자학이야" 등의 수도 없는 자문자답과 "쯧쯧 사서 고생", "달리기를 하느니 차라리..."등등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혀를 차며 안타깝게 던지는 몇마디를 자학의 증거로 삼는다.
그러면 달리기의 어떤 힘이 주로에 불현 듯 나타나는 자학의 이정표를 과감하게 걷어차고 피니쉬아취를 향해 돌진하도록 하는가?
여기에서도 역시 이 힘의 원천을 한마디로 정의 할 수 있다면 자학적 접근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때문에 주제가 다소 버겁더라도 자학과 죽음의 의미를 서툴게나마 다시한번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자학이란 사전적 의미 그대로 자기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 자신의 마음대로 겠지만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을 학대하는 그 자체의 행위가 비정상이므로 거기에는 죄의식 아니면 또 다른 부정적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자칫 파멸로 이를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계를 한다.
따라서 수도없이 내려지는 자학의 장벽을 힘차게 거두어 올리며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는 달리기는 결코 자학이 아니며 자학의 수단으로도 적절치가 않음은 누구도 쉽사리 잘라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설사 달리기가 자학의 도구로 활용된다 해도 걱정할 것이 없다. 달리다 보면 자기성찰과 뚜렷한 목표의식으로 병적인 죄의식의 늪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기의 '참 맛'이 위대한 이유는 여기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자학의 문제는 이 정도로 끝낸다 해도 필리피데스의 죽음을 비롯해 이따금 전해지는 달리다가 죽었다는 "비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이 것은 의외로 쉽사리 설명이 가능하다. 앞서 경제학적인 접근에서 밝혔듯 생전 처음으로 달린후에 느낀 각인된 성취감은 거리를 아무리 늘려도 따라갈 수는 없지만 생사를 초월한 도전정신과 모험심만은 점점 더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달리기는 생사를 초월해 인간의 삶의 영역을 넓혀가고자 하는 신성한 도전과 모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주를 향한 인간의 욕구는 우주선을 띄워서 달로, 또 허블망원경을 통해 까마득한 천체로까지 삶의 영역을 확대해 왔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로 이같은 행위와 결코 뒤질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흔히 마라톤을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라고 표현한다. 필리피데스의 죽음에서 비롯된 마라톤이 일반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자리매김 하기까지는 수많은 도전과 모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달리기를 하다 죽음을 마지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자신 또는 인간의 삶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도전과 모험중에 마지하는 흔치않은 "숭고한 최후", 희생인 것이다.
만약 그 죽음이 하찮은 것이었다면 달리는 사람들이 감히 "Shall we dance?"가 아닌 "Shall we run?"하며 정중하게 달리기를 권할 수 있을까? (감히 달리기에 왜나라 영화 제목을 들먹거려 죄송)
자학적 접근 역시 달리기의 매력을 한껏 돋보이게는 했지만 한마디로 정의하는 데는 실패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뭍사람들을 심취케 하는 달리기의 힘은 정녕 위대한 나머지 간단명료한 한마디로의 표현을 거부하는 것일까?

(약물학적인 접근)

사실 이 접근 방법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흔히들 "중독'이라는 말로 달리기의 심취정도를 쉽사리 표현하는데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이 짙어 잠시 살펴보고자 제목으로 달아본 것 뿐이다.
환각성 약물에 중독돼 끊을 수 없는 경우와 비교해서 "중독"이라는 말로 쉽사리 표현한다는 그 자체에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왜인지 모른다. 체감되는 달리기의 맛을 늘어난 거리와 단축된 시간으로 보상받으려는 단순한 달리기일지라도 무책임한 몰락으로의 질주와 비교한다는 그 자체가 싫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고수"니 "하수"니 하는 표현 자체도 경건한 달리기에 대한 흠집으로 느껴져 자제하자고 제의한 경우도 있지만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인 것이다.

(종교적 접근)

흔히 과학의 힘으로 풀지 못하는 경우는 조물주 존재의 인정과 함께 종교의 힘으로 대신 하고자 하는 경우를 본다. 이 방법 저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해도 숙제가 도무지 풀리지 않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종교적 접근을 시도해 본다.이 역시 과대포장-.
비록 목적은 다르다 해도 목적에 이르는 제반 환경은 많은 유사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나 전철 등에서 목탁소리 아니면 목회자들의 목청껏 외치는 전도의 소리를 자주 듣는다. 달리는 사람들도 몇 번 달리고 나면 옆 사람에게 달릴 것을 주저 않고 권한다.
왜일까? 자신이 경험해본 가치를 옆 사람과 나누고 공유하고픈 열망 때문일 것이다. 그 좋은 경험을 혼자만 가두자니 이기적인 것 같고...
때로는 간증이라는 방법도 형태만 다를 뿐 똑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종교의 신앙생활과 달리기생활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먼저 신앙생활을 생각해 보자.
주지하다시피 종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어떠한 종교든 자유, 평등 박애에 이상을 두고 있다. 그 이상을 실천함으로 해서 열반이든 천국이든에 이르러 평안을 찾는다는 것이다.
결국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來世求福的(내세구복적)인 행위인 것이다. 내 자신이 사는 동안 아무리 어려움이 따라도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을 지향하고 실천하면서 살아가면 죽은 후에는, 내세에서는 천당이든 열반에 이르러 행복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잠시 이어지던 생각을 멈추고 내세구복의 복자에 동그라미를 조심스럽게 그려본다. 그러자 갑자기 형광등의 스타트램프처럼 불빛이 반짝이듯 가재의 머리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아무리 무딘 머리일지라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무엇인가 가닥이 잡히는 듯 실마리가 급속히 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바로 그것인 것이다.
숙제의 해답을 밝히기에 앞서 신앙생활은 그렇다치고 달리기 생활은 어떤 것인지 다시한번 음미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 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의 경험에서처럼 좋은 점이 많으니까 다른 사람에게까지 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귀찮아도 할 수 없이 좋은 점을 몇가지 열거해 본다.
건강해진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니 가족이 화목하고, 고통과 후회의 가치를 실감하니 자유 박애 평등이 절로 사회가 밝아진다. 또 성급한 사람들은 마라톤을 끝내고 감흥에 겨워 "마라톤은 인생이다"라고까지 말하지만 나무랄 필요는 없다. 달리기는 인내와 끈기 등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적극적인 사고와 더불어 미래에 대비한 역경극복의 예비훈련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삶의 질이 업그레이드 되는 것은 물론 항상 새롭고 반가운 만남의 기회가 주어져 하루가 다르게 적극적이다.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등등...
달리기의 좋은 점은 밤을 새워 이야기 해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내세구복적인 신앙생활과 감히 비교해 본다.
비교해 보는 순간 엄연한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모든 숙제가 풀렸다는 기분으로 별안간 홀가분 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비로서 머릿속 온라인상의 마라톤도 결승점에 다다른 느낌이며 청량감마저 느껴진다.
한마디로 잘라 말해서 달리기는 내세지향적인 신앙생활과는 달리 現世求福的(현세구복적)인 행위, 살아있는 동안 몸으로 체감할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복을 구하는 행위인 것이다.
다시말해 달리기는 곧 행복창조며 달린다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 가면서 영위하고 나누는 행위인 것이다.

(에필로그)

탐탁치 않은 머리로 긴 여정을 거슬러 온 보람이 있었다는 생각이다. 당분간이 될지 또 몇 년이 될지 이 보다 더 좋은 표현이 생각이 날 때까지는 누가 물으면 달리기는 행복창조라고 자신있게 말할 것이다. 또한 1년후에도, 또 2년후에도, 10년후에도 같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해보면서 "달리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심사숙고한 결과를 글로 남겨볼 생각이다. 먼훗날 그 때도 또 다른 어떤 답을 구할 것인지 아니면 "행복창조"로 만족해 그대로의 생각을 변치 않고 유지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생각으로는 달리기는 행복을 창조하는 순수한 행위예술이라는 생각에 큰 만족을 갖는다. 다시 말해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우리는 곧 달리기퍼포먼스의 주인공인 것이다. 스스로가 연출가가 되고 주인공이 되어서 행복을 창조하고 체감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혼을 쏟는 행위예술가인 것이다.
그러나 온로드(on-road)이든, 오프로드(off-road)이든 아니면 온라인(on-line)이든, 오프라인(off-line)이든 우리의 공연장이 도처에 널려있다고 해서 운동화 끈만 졸라매면 누구나 주인공으로 손쉽게 캐스팅 될 것이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물론 여기에도 지켜야 할 룰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까다로울 것은 없다. 운동화 끈을 졸라매는 순간 그 룰은 떠올려 진다. 기본 룰을 도외시한채 혹 내가 만든 행복 내맘대로 라는 생각으로 뛴 거리와 시간만을 앞세워 기량과 우월감에 도취되면 시도 때도 없이 사방군데서 튀어나오는 "날뛴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바라보는 사람과 걷는 사람 이끌어 함께 달리고 행복을 만들어 공유하는 것이 달리기 퍼포먼스의 최소한의 기본 룰인 것이다.

(늘 눈에 띄는 서울마라톤클럽의 소박한 메시지 "달리면 행복해요"를 보면서 예감된 행복을 몇자씩 적어보았습니다. 표현이 모자라 혹 누가됐다면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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