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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다가 자빠져 보셨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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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복진 작성일02-12-23 21:10 조회6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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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다가 자빠져 보셨나요 ?

안녕하십니까 ?
서울
고덕 달림이
박복진입니다

최근에 구입한, 두 눈만 빼고 얼굴 전체를 덮는 위장 무늬 방한 마스크를 쓰고 달리니
두 볼과 턱 주위의 추위는 물리쳤지만

거친 호흡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발생되는 마스크 안의 따뜻한 공기와
그 공기가 위로 품어지며 안경알 안으로 파고들어 생기는 더운 입김 때문에,
안경알 위의 뿌연 현상은 어찌할 수 가 없습니다.

그래도 심한 근시 때문에 안경을 벗고 뛸 수 는 없고
끼고 뛰자니 십 여 뜀도 못 가서 안경알 위의 뿌연 입김 때문에 앞이 안보이니
여간 낭패가 아닙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나 홀로 결론을 내기를,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갈 때까지는 불편하지만 안경을 쓰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혹시 아는 주민, 이웃을 만나면 알아보고 인사를 해야 하니까요....
새벽 이 시간에 그런 분을 만날 확률은 극히 적지만 그래도...
혹시 날 보고 아는 채 하며 인사하는 분을 못 알아보면 큰 실례이니까요 ...

그런 다음에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게내 천 뚝방 길에 들어서면 안경을 벗어 들고
뛰기로 했습니다 . 이 시간 바깥은 아직도 어둠이 걷히지 않아 어차피
내 약한 시력으로는 물체의 선명한 식별도 불가능하거니와
매일 매일 같은 길을 뛰는 나에게 어지간한 도로 장애물은 이미 그 위치와,
크기, 위험도가 익숙한 때문이기도 한 약간의 위안이 있어서도 입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고, 본격적인 주로인 한강변 미사리, 팔당 가는 길
에스파란자스 길에 이르자 썼던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안경을 쓰시는 분은 쉬이 짐작이 가시겠지만 우선 안경을 벗으면
물체가 번지어 두 겹, 세 겹으로 보이고
따라서 선명치 못한 그 물체는 본래의 크기에서 크게 확장되어
엄청 크게 보입니다.

우선 제일 쉬운 대상으로,
캄캄한 새벽녘 고고히 한강 물위에 비취이는 강 건너 덕소의 아파트 야경,
최근에 새로이 확장 개통된 강동대교 위의 제법 화려한 가로등 불빛들,
이 빛들이 한강 물위에 길게 길게 꼬리 흔들며 거꾸로 박혀 있는 모습은
평소 크기의 두 배, 세 배로 보입니다.
더 화려해 보여 한 편으로는 멋진 성탄 장식 같은 느낌도 듭니다

차가운 겨울, 새벽 동녘 하늘 위의 별, 샛별 크기도 평소의 두 배, 세 배 입니다
눈의 초점을 맞추어 자세히 보려고 미간을 찡그려 보지만 별의 선명도는 그대로 이고
다가오는 느낌은 별반 달라진 게 없습니다

쓰삭, 쓰삭, 달리는 동작에 맞춰 방한복의 톱파가 머리 위에서 스치는 소리만 나고,
두껍게 머리를 감싼 방한복 때문에 자박, 자박 발걸음 소리는 한 옥타브가 낮게 들립니다
벗은 안경 때문에 달리는 앞길은 붕 떠 보이지만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이 길,
매일 아침 성자의 의식처럼 빼먹지 않고 달리는 이 길, 난 두 눈 감고서도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이런 우쭐한 자부심과 나란히 어께 동무한 방심이 불길한 그림자 되어 내 앞을
지나갔다고 느낀 순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어 ? 어 ! 아이쿠 !! 허우적, 풀썩, 꽈 다당 !!
.................

안경을 벗어 맞지 않은 초점 때문에 부웅 떠 보였던 이 길,
평소에 이쯤에서 시멘트 턱이 있으니 언제고 조심하며 지나갔던 이 길을
필요 이상으로 앞발을 높이 든 것까지는 좋았으나 거리 감각을 못 맞춰
앞 발끝이 시멘트 턱에 그대로 걸리어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졌습니다

공포스러울 만큼 차가운 시멘트 바닥,

그대로 한참을 엎드려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려 가면서 내가 넘어졌던 자세를 생각 해 내려 합니다
정형 외과 의사의 질문을 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자빠졌는지 자세를 알아두어 진료 시간을 단축해 줘야 합니다.
지금은 정형외과 의사도 팔 전문, 다리 전문이 각각 다르니
진료과목 신청서 작성부터 똑바로 해야 합니다

자빠진 처음의 그 자세로 한참을 그대로 엎드려 있다가 생각을 정리합니다
턱은 약간의 충격이 있으나 위장 무늬 방한 마스크 때문에 찰과상은 없는 듯 합니다
두 손바닥은 약간은 우리 하지만 두꺼운 우레탄 스폰지 방한 장갑 내피 때문에
큰 부상은 없는 듯 합니다. 그러나, 손바닥 안쪽의 장갑천이 찢어져 나갔습니다
왼쪽 무릎 부위의 바지 츄리닝도 헤져 나갔습니다
왼쪽 엉치 뼈에 약간의 통증이 서서히 전달돼 옵니다.

으으으... 아으 아으으...
갈수기에 물웅덩이를 발견하고 물 마시러 왔다가,
악어한테 앞발 물렸지만 구사 일생으로 빠져 달아난 얼룩말의 신음처럼
혼자서 동물 같은 신음 소리를 내어 보며 통증 부위를 더 더듬거려 봅니다
이제 더 이상의 상처 부위가 없는 듯 하여 다행입니다.
이미 식어 버린 땀, 금새 내려 가고있는 체온이 정신을 들게 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늘을 보며 알 시멘트 바닥 위에 다시 똑바로 돌아 누워 보았습니다
자빠진 김에 쉬어 가보자 하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러자 나는 곧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전에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굉장한 광경이 누운 내 두 눈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직은 어둑어둑한 겨울 새벽의 동녘 하늘, 거기에는 성스런 고요가, 아직 밝히지 않은
새로운 아침의 거룩한 준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누운 그 자리 바로 옆, 내 볼에는 다 말라비틀어진 작은 들풀의 기다란 위용이
내소사 입구의 전나무 숲처럼 크고 울창해서 경외로움이 절로 났습니다
내가 달리며 위에서만 바라보던 하쟎던 작은 들풀이 땅바닥에 누운 나와
눈 높이를 맞추자 모두가 궁궐을 짓는데 공출 당하는 커다란 왕 소나무 같이 보였습니다

한강 물위에 거꾸로 처 박혀 있던 강 건너 불빛 가로등은
거대한 신전 기둥에 조명을 쏘아 올린 너무나,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헉 !헉 ! 대며 뛰어 지나가던, 여름내 단 한 차례의 내 눈길도 받지 못했던 이 들풀이
나와 볼을 같이 맞대고 호흡을 하니, 입고 있는 밍크 털처럼 정감이 갔습니다.

처음 가져본 황홀한 이 느낌이 방금 자빠졌던 그 충격을 자연 치유해 주는 듯 합니다

나는 거기서 더 한참을 그대로 누워서 그 황홀한 순간을 길게 늘리어 보았습니다
이제 땀이 다 식고 꽁꽁 언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공포로 변하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아무도 없는 새벽, 에스퍼란자스 달리기 길에 자빠진 나는 거기 그대로 누워서
또 다른 높이의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달림이 여러분 !
아무도 없는 새벽 길 달리시다가 넘어지시면 바로 일어나지 마십시요.
거기 그대로 누우셔서 평소와는 다른 눈 높이로 세상을 바라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잠깐만이라도... 아주 잠깐만이라도........

그리고 맛 보십시요
다른 각도로 바라보이는 또 다른 눈 높이의 또 다른 세상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서울
고덕 달림이
박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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