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달리는 참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현일 작성일00-10-31 01:47 조회1,110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대한매일 문화스냅 2000] 보통사람들 ‘마라톤 열풍’
‘참 별스런 취미군.그 많은 운동중에 왜 하필 그 지루하고 힘든 뜀
박질이야’
마라톤을 운동삼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제 솔직한 첫느낌은 그랬습니
다.건강을 위해 또는 뱃살 빼려고 100리길을 죽자사자 뛴다는 게 쉽
게 납득이 안가더군요.좀더 번듯하고 재미있는 운동도 많잖아요.배드
민턴,농구,등산,테니스,수영,헬스,에어로빅 등등.
무슨일인지 요즘 전국이 마라톤 붐이랍니다.직장 또는 지역동호회 등
에서 무려 10만명이 달리고 있고 자고나면 마라톤대회가 생긴다나요.
한강 둔치나 일산호수공원,그밖에 뛰기 좋은 장소는 어김없이 꼭두새
벽 단잠을 물리치고,이슥한 밤이슬을 맞으며 운동화끈 질끈 매고 달
리는 ‘중독자’들로 북적댑니다.
“왜 뛰십니까” 물으면 “그냥 좋아서 달립니다.인생이 달라진다니
까요”하고 스님네 선문답 같은 소리만 합니다.
마라톤,물론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죠.일제시대 때 손기정옹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해 민족의 정기를 일깨웠고,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서 월계관을 쓴 황영조,98년 방콕아시안게임서 우승한 이봉주 등등
자랑할만한 건각(健脚)들도 많습니다.그렇지만 그건 소수 엘리트선수
들의 ‘신화’였지 보통사람의 해당사항은 아니었잖습니까.
최근에 요쉬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의 달리기 체험기 ‘나는 달리고
싶다’를 번역한 마라톤광 선주성씨는 마라톤인구가 IMF(국제통화기
금) 체제를 전후해 부쩍 늘기 시작했다는군요.평생직장이란 개념이
깨지면서 한층 치열해진 경쟁세계에서,살아남기 위한 무기는 건강이
라는 생각을 뼈저리게 했다는 게 그의 분석입니다.
또 달리는 맛이 여간이 아니랍니다.유식한 말로 ‘러너스 하이(runne
r’s high)’라는 게 있대요.달리기를 시작해 30∼40분쯤 가슴이 터
져버리고 호흡이 딱 멈춰 버릴 것 같은 극한의 고통이 지나간 후에
무아지경이 찾아온답니다.누구는 ‘하늘을 나는 느낌’이라 하고 누
구는 ‘꽃밭을 걷고 있는 기분’이래요.어찌나 짜릿한지 완전히 중독
이 된다는군요.
‘나는 달린다’의 주인공 피셔도 중독자중 한 사람이죠.3년전 거대
한 뚱보에다 이혼까지 당한 막다른 처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 그는 1년만에 40㎏을 빼고 나서도 달리는 게 좋아 오늘도 달
린답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들도 얼마전 달리기가 효과적인 우울증 치료약이
라는 연구결과를 내 놓았습니다.운동 중 체내에 ‘베타 엔돌핀’(일
종의 마약 성분)이란 물질이 분비돼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데 정확한
메카니즘은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는군요.
알코올이나,히로뽕처럼 끊으면 금단 증세가 오긴 하지만 남에게 해가
되지 않고,사는 활력까지 넘치게 하니 ‘좋게 중독된’ 거지요.
마라톤만큼 원시적인 운동이 또 있을까요.첨단문명의 이기들이 쏟아
져 나오는 세상에,그저 맨몸과 두 다리로 달리니 말입니다.관절을 보
호하기 위해 좀 좋은 전용 운동화를 장만하는 것 빼고는 돈도 안듭니
다.하긴 에티오피아의 마라톤 영웅 아베베는 그도 저도 없이 맨발로
달렸지만요.
달리는 ‘사연’을 엿보려고 서울마라톤클럽이라는 마라톤동호회의
인터넷사이트에 들어갔습니다.100㎏ 넘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 시작해
1년만에 30㎏을 뺐다는 고형식(47·개인사업)씨,지난해 사랑하는 아
내가 갓난아이를 두고 뇌출혈로 숨지자 고통을 잊기 위해 뛴 구자춘(
33·체육교사)씨,마흔살이 되던 생일날 아침 야릇한 기분에 달리기
시작해 풀코스를 무려 17번 완주한 오혜영(53·영동세브란스 건강관
리센터)씨,그밖에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사연이 있더군요.
달리기는 어쩌면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 같습니다.무리지어 뛰는
듯하지만 결국은 혼자이고,‘힘든데 이제 그만 달릴까’ 하고 유혹하
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죠.빨리 간다고 좋은 것도,늦게 간다고 나
쁜 것도 아니랍니다.42.195㎞란 긴 여정의 초반에 얼마나 빨리 잘 뛰
었냐는 중요하지 않대요.괜히 분수 안지키고 옆사람과 경쟁이 붙어
오버페이스하면 중도포기하기 십상입니다.
인생도 그렇잖아요.‘첫끝발이 ×끝발’이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
잖아요.살다보면 견뎌야 할 고비가 어디 한둘인가요.인생이라는 잔은
다 비워야 하듯 42.195㎞는 끝까지 달려야 한다는 얘기죠,뭐.
그래서인지 마라톤은 젊다고 잘 달리란 보장이 없습니다.인생의 여러
구비를넘은 중장년층에 매니아가 급증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
피셔는 책의 끝머리쯤에 조심스럽게 고백합니다.“아마도 나는 부처
를 만나고 있는지 모른다”라고요.
내속의 ‘나’를 찾기 위해,마음속 부처를 만나기 위해 ‘달리는 참
선’.그 소박한 몸놀림에 그런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습니다.
이제 길거리에서 스쳐지나는 ‘고독한 주자(走者)’들을 보면 마음속
으로 따스한 박수라도 쳐주어야 겠어요.하긴 인생은 모를 일이죠.어
쩌면 내일 아침 문득,거리로 뛰쳐나가 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
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허윤주기자 rara@kdaily.com 사진 안주영기자 jya@kdaily.com
‘참 별스런 취미군.그 많은 운동중에 왜 하필 그 지루하고 힘든 뜀
박질이야’
마라톤을 운동삼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제 솔직한 첫느낌은 그랬습니
다.건강을 위해 또는 뱃살 빼려고 100리길을 죽자사자 뛴다는 게 쉽
게 납득이 안가더군요.좀더 번듯하고 재미있는 운동도 많잖아요.배드
민턴,농구,등산,테니스,수영,헬스,에어로빅 등등.
무슨일인지 요즘 전국이 마라톤 붐이랍니다.직장 또는 지역동호회 등
에서 무려 10만명이 달리고 있고 자고나면 마라톤대회가 생긴다나요.
한강 둔치나 일산호수공원,그밖에 뛰기 좋은 장소는 어김없이 꼭두새
벽 단잠을 물리치고,이슥한 밤이슬을 맞으며 운동화끈 질끈 매고 달
리는 ‘중독자’들로 북적댑니다.
“왜 뛰십니까” 물으면 “그냥 좋아서 달립니다.인생이 달라진다니
까요”하고 스님네 선문답 같은 소리만 합니다.
마라톤,물론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죠.일제시대 때 손기정옹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해 민족의 정기를 일깨웠고,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서 월계관을 쓴 황영조,98년 방콕아시안게임서 우승한 이봉주 등등
자랑할만한 건각(健脚)들도 많습니다.그렇지만 그건 소수 엘리트선수
들의 ‘신화’였지 보통사람의 해당사항은 아니었잖습니까.
최근에 요쉬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의 달리기 체험기 ‘나는 달리고
싶다’를 번역한 마라톤광 선주성씨는 마라톤인구가 IMF(국제통화기
금) 체제를 전후해 부쩍 늘기 시작했다는군요.평생직장이란 개념이
깨지면서 한층 치열해진 경쟁세계에서,살아남기 위한 무기는 건강이
라는 생각을 뼈저리게 했다는 게 그의 분석입니다.
또 달리는 맛이 여간이 아니랍니다.유식한 말로 ‘러너스 하이(runne
r’s high)’라는 게 있대요.달리기를 시작해 30∼40분쯤 가슴이 터
져버리고 호흡이 딱 멈춰 버릴 것 같은 극한의 고통이 지나간 후에
무아지경이 찾아온답니다.누구는 ‘하늘을 나는 느낌’이라 하고 누
구는 ‘꽃밭을 걷고 있는 기분’이래요.어찌나 짜릿한지 완전히 중독
이 된다는군요.
‘나는 달린다’의 주인공 피셔도 중독자중 한 사람이죠.3년전 거대
한 뚱보에다 이혼까지 당한 막다른 처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 그는 1년만에 40㎏을 빼고 나서도 달리는 게 좋아 오늘도 달
린답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들도 얼마전 달리기가 효과적인 우울증 치료약이
라는 연구결과를 내 놓았습니다.운동 중 체내에 ‘베타 엔돌핀’(일
종의 마약 성분)이란 물질이 분비돼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데 정확한
메카니즘은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는군요.
알코올이나,히로뽕처럼 끊으면 금단 증세가 오긴 하지만 남에게 해가
되지 않고,사는 활력까지 넘치게 하니 ‘좋게 중독된’ 거지요.
마라톤만큼 원시적인 운동이 또 있을까요.첨단문명의 이기들이 쏟아
져 나오는 세상에,그저 맨몸과 두 다리로 달리니 말입니다.관절을 보
호하기 위해 좀 좋은 전용 운동화를 장만하는 것 빼고는 돈도 안듭니
다.하긴 에티오피아의 마라톤 영웅 아베베는 그도 저도 없이 맨발로
달렸지만요.
달리는 ‘사연’을 엿보려고 서울마라톤클럽이라는 마라톤동호회의
인터넷사이트에 들어갔습니다.100㎏ 넘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 시작해
1년만에 30㎏을 뺐다는 고형식(47·개인사업)씨,지난해 사랑하는 아
내가 갓난아이를 두고 뇌출혈로 숨지자 고통을 잊기 위해 뛴 구자춘(
33·체육교사)씨,마흔살이 되던 생일날 아침 야릇한 기분에 달리기
시작해 풀코스를 무려 17번 완주한 오혜영(53·영동세브란스 건강관
리센터)씨,그밖에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사연이 있더군요.
달리기는 어쩌면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 같습니다.무리지어 뛰는
듯하지만 결국은 혼자이고,‘힘든데 이제 그만 달릴까’ 하고 유혹하
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죠.빨리 간다고 좋은 것도,늦게 간다고 나
쁜 것도 아니랍니다.42.195㎞란 긴 여정의 초반에 얼마나 빨리 잘 뛰
었냐는 중요하지 않대요.괜히 분수 안지키고 옆사람과 경쟁이 붙어
오버페이스하면 중도포기하기 십상입니다.
인생도 그렇잖아요.‘첫끝발이 ×끝발’이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
잖아요.살다보면 견뎌야 할 고비가 어디 한둘인가요.인생이라는 잔은
다 비워야 하듯 42.195㎞는 끝까지 달려야 한다는 얘기죠,뭐.
그래서인지 마라톤은 젊다고 잘 달리란 보장이 없습니다.인생의 여러
구비를넘은 중장년층에 매니아가 급증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
피셔는 책의 끝머리쯤에 조심스럽게 고백합니다.“아마도 나는 부처
를 만나고 있는지 모른다”라고요.
내속의 ‘나’를 찾기 위해,마음속 부처를 만나기 위해 ‘달리는 참
선’.그 소박한 몸놀림에 그런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습니다.
이제 길거리에서 스쳐지나는 ‘고독한 주자(走者)’들을 보면 마음속
으로 따스한 박수라도 쳐주어야 겠어요.하긴 인생은 모를 일이죠.어
쩌면 내일 아침 문득,거리로 뛰쳐나가 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
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허윤주기자 rara@kdaily.com 사진 안주영기자 jya@kdaily.com
추천 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