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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광장

답글 : 흉년에는 논을 사지 마라 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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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승삼 작성일02-07-11 19:38 조회3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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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길어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유지 비결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감되는 얘기입니다.
무릇 최고의 반열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기술/투지 등이 있어
최고의 자리에 오르나 정작 그 역할을 수행할 자질/비전/철학이 없어
뽑아준이에게 실망만 안겨주는 분들이 많은 상황인지라..

[셋째, 흉년에는 논을 사지 마라.]
흉년으로 배고픈 소지주는 쌀 한 말에 논 한마지기라도 팔아야할 형편
이었다면 최부자댁에서 사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헐값에 삿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부자댁에서 일단 사들이되 換賣조건부(Re-purchasing)로
해서 풍년든 해에 적절한 이문을 붙여 되팔아주었다면 더 좋은 결과를
주지 않았을까요?
그 땐 이런 개념이 없던 때였나요?

아참! 조용헌교수님 또는 경주최부자댁에 여쭐사항이었나요?

그냥 여쭤보고 싶었던 양승삼이었습니다.


이동윤 님 쓰신 글 :
> "삼대가는 부자 없다"는 많이 듣는 경구가 있습니다.
> 그 이유는 아마도 대부분 부자집 아이들은 온실 속에서 자라서 자신의
> 경쟁력과 독립심을 창출하거나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
> 몇대를 거쳐 부자를 유지하는 건 단지 기술이 좋은 것 이상의 철학이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
> KTB n-daily의 조용헌(chy062@wonkwang.ac.kr) 님의 글입니다.
>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교수로서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의 저자)
>
>
> 한국에도 명부(名富)가 있다. 그 집이 바로 경주에 있는 최(崔)부자집이다. 최부자집은 9대 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만석을 한 집안으로서 조선 팔도에 널리 알려진 집이다. 만석꾼이야 찾아보면 많지만 12대를 연이어 만석을 한 집안은 아마도 조선 팔도에 이 집뿐일 것이다. 3대도 어려운데 어떻게 12대를 이어갔단 말인가? 그럴 수 있게 하였던 경륜과 철학이 반드시 있었을 텐데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
> 명문이 될 수 있었던 네가지 철학
> 최부자집에는 대대로 이어져온 가훈이 내려온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이다.
>
>
> 첫째, 진사(進士) 이상은 하지 마라.
> 이는 한마디로 정쟁(政爭)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조선시대 진사라는 신분은 초시(初試) 합격자를 가리키는데, 진사라고 하는 것은 벼슬이라기 보다는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자격 요건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와 같은 신분 사회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진사 정도는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최 씨 집안은 진사를 넘어서는 벼슬은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조선시대는 당쟁이 심한 사회였으므로 벼슬이 높아질수록 자의반 타의반으로 당쟁에 휩쓸리기 쉬웠다. 한번 당쟁에 걸려들어 역적으로 지목되면 남자는 사약을 받거나 아니면 유배형이고 그 집의 여자들은 졸지에 남의 집 종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최 씨 집안에서는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한다는 것은 멸문지화의 가능성에 접근하는 모험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은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벼슬의 기회가 있다면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우선 당장하고 보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집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벼슬의 종착역이 과연 어디까지인가를 끝까지 꿰뚫어 본데서 나온 통찰력의 산물이었다.
>
> 둘째,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 만석은 쌀 1만 가마니에 해당하는 재산인데, 이 이상은 더 재산을 불리지 마라는 말이다. 돈이라는 것은 가속도가 붙는 성질이 있다. 처음 어느 궤도에 오르기까지가 어렵지 그 궤도를 넘어서는 재산을 모으면 그 다음부터는 돈이 돈을 벌어들이는 상황에 돌입한다. 그런데 최부자집은 만석 이상 불가의 원칙을 따라 그 이상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환원 방식은 소작료를 낮추는 방법이었다. 최부자집이 당시의 대체적인 소작료인 수확량의 7~8할을 받게 되면 만석을 초과하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5할을 받거나 그 이하로도 받았다. 이 정도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그러니 주변 소작인들은 앞을 다투어 최부자집의 논이 늘어나기를 원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저 집이 죽어야 내 집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저 집이 살아야 내 집이 산다는 상생(相生)의 방정식을 생각해 보라. 이 어찌 아름다운 장면이자 통쾌한 풍경이 아니겠는가!
>
> 셋째, 흉년에는 논을 사지 마라.
> 조선시대의 경우 흉년이 들어서 아사직전의 상황에 직면하던 때에는 쌀 한말에 논 한 마지기를 헐값에 넘기기도 하였다. 우선 당장 먹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까 논 값을 제대로 따질 겨를이 있을 수 없다. 쌀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부자는 바로 이러한 기아 상태의 흉년이야말로 없는 사람들의 논을 헐값으로 사들여서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상극(相剋)의 방정식이다. 그러나 최부자는 이러한 상극의 방정식을 금했다. 이는 양반이 할 처신이 아니요, 가진 사람이 해서는 안될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
> 넷째,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 과객은 길 가던 손님을 말한다. 요즘같이 여관이나 호텔이 많지 않았으므로 여행을 하던 나그네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양반집이나 부자집에 며칠씩 또는 몇 달씩 그 집 사랑채에 머물다 가는 일이 흔한 일이었다. 이들 과객들의 성분은 다양하였다. 몰락한 잔반(殘班)으로서 이 고을 저 고을의 사랑채를 전전하며 무위도식하는 고급 룸펜이 있었는가 하면, 학덕이 높은 선비나 시를 잘 짓는 풍류객도 있었고, 무술에 뛰어난 협객도 있었다. 최부자집에서는 이들 과객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
> 어느 정도 후하게 대접하였는가를 보자. 최부자집의 1년 소작수입이 쌀3천석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천석은 가용으로 쓰고, 1천석은 과객 접대하는데 사용하였고, 나머지 1천석은 주변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썼다고 한다. 1년에 1천석이면 당시의 경제규모로 환산해 보면 엄청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과객을 대접하는데도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다. 과객 중에서 상객(上客)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매끼 식사할 때마다 '과매기(마른 청어를 일컫는다) 1마리를 제공하고, 중객(中客)에게는 반마리, 하객(下客)에게는 4분의 1마리를 제공하였다. 최부자집에 과객이 많이 머무를 때는 그 숫자가 100명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이상을 넘어설 때는 최 부자집 주변에 살고 있던 초가(노비들이 사는 집)로 과객들을 분산 수용하였다고 한다. 부득이 과객을 분산해야 할 때에는, 그 과객에게 반드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과매기 1마리와 쌀을 쥐어서 보냈다. 과객이 최부자집에서 쌀과 과매기를 가지고 주변의 노비집으로 가면, 그 노비집에서는 무조건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도록 룰이 정해져 있었다. 과객들을 접대하는 대가로 최부자집 주? ??사는 노비들은 소작료를 면제 받았다.
>
> 이처럼 한국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지를 실천한 증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부자집은 그러한 명문가 중의 하나로서 돈이 있되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여유는 있되 그러한 여유를 남에게 나눌 줄도 아는 마음이 있기에 진정한 명문가로 인정받는 것일 것입니다.
>
> 항상 즐겁고 건강한 달리기 생활되시길 빕니다.
> 지구사랑 달리기 클럽/달리는 의사들 이동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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