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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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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광호 작성일02-07-11 08:41 조회5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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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중주

도반들의 취중주와 우중주를 듣고 보아오던 내게도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름하여 태풍중주(颱風中走).

지난 주 금,토 1박 2일로 무주리조트엘 갔다. 회사 발전방향에 대한 웍샾 인솔차였다.
금요일 하루의 공식 일과가 끝나고, 홀가분한 객지의 밤에 마음들은 들떴지만,
태풍 라마손의 영향으로 말 달리는 듯한 바람소리와,
폭우는 아니었지만 끊이지 않고 내리는 비로 외출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우선 내 방에 17명 모두가 모여 캔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회사 발전방향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한, 두명이 고스톱을 하자는 제안을 하였지만 반응이 모두 냉냉하여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이런 자리가 있으면 흔히 그런 놀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상은 변해있다.
안정화사회에서는 다소 편한 마음으로 놀이를 즐겼지만
지금처럼 급변하는 시대에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탓이리라.

그럭저럭 별다른 행동없이 삼삼오오 대화속에 12시가 넘고 1시가 넘었다.
동안에도 계속 밖의 날씨에 신경을 기울이지만, 바람소리는 잦아들지 않는다.
일전에 이곳 리조트에 두어번 들렸을 때마다
무주구천동의 신선한 공기속에서 달려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지만
여건이 되지않아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림이 복장과 운동화도 가져왔고, 시간도 가능하지만 천후가 저렇다.
어찌해야 하나?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든 시각이 2시에 가깝다. 깜빡 눈을 붙인 듯한데, 눈을 뜨니 5시 반이다.
청정무주의 공기탓인지 몸이 가뿐하다. 튕기듯이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밖은 벌써 제법 밝은데 빗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 바로 이때다. 부랴부랴 옷을 챙겨입고 운동화 끈을 댕겨매는 동안에도 마음은 설레고,
벌써 리조트를 달리고 있다.
무주리조트는 겨울이 제격이지만, 신록이 풍성한 여름도 매우 좋다.

숙소인 민들레동 현관에서 심호흡을 하고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했다.
막상 도로로 나서니 어두움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빗줄기가 제법 굵다.
다시 들어갈 수도 없고 내친김에 달리기로 한다.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달리기 시작했다.
급격한 오르막이다. 금새 호흡이 턱에차고 가슴이 답답해온다.
출발하자마자 급경사를 오른 탓이리라.
정확히 5분을 달리고나니 다행히 무주골프장 입구인 평지가 나온다.
기수를 돌려 한솔동, 두솔동... 각 동을 차례차례 순례한다. 급할 게 없다.

계곡을 지날 때 밤새 내린 비로 불어난 물의 위압적인 소리가 귀를 때린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곧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이런 분위기에서는 달리지 못할 것 같다.
리프트를 타는 곳에 이르렀다.
아무도 없는 텅빈 좌석들이 외줄에 매달려 새벽 허공에 떠있다.
리프트들 아래로 역시 휑한 슬로프가 쓸쓸하다. MTB 코스가 보인다. 따라서 달려본다.
이렇게 높은 오르막을 어찌 자전거로 오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자전거도로 양 옆 슾지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우렁차다.
개굴개굴개굴......
도로위에는 군데군데 물이 고여있고,
한뼘 반은 넘을 커다란 지렁이가 느릿느릿 어디론가 가고있다.
계속 달린다. 저만치 웰컴하우스가 지나가고 아이들 놀이터가 나온다.
각종 놀이기구들이 빗속에 외롭다.
빗물은 계속 스며들어 입고있는 면티와 팬츠와 운동화는 이미 흠뻑 젖었고,
얼굴에도 전방위로 흘러내려 속수무책이다.

전에 행사차 왔을 때의 밤이 생각났다.
몇몇이 얼큰한 상태에서 숙소로 돌아와 2차를 마시고 있었다.
참가자 중의 한사람이 동석한 사장 비서에게 연신 양주를 따라준다.
한참 후배이고, 그리 친하지도 않아보이던데 갖은 찬사와 더불어.
오히려 자신의 직속부하에게는 눈길 한번 줄 겨를이 없다.
사장의 측근이 중요해서일까.
보기가 민망하여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와 호프집으로 향했다.

교훈이다.
내 식솔이 가장 중요하다. 가정도 같다.
내 식솔을 먼저 챙기지않고, 그래서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정과 조직을 경영할 수 있는가. 리더쉽의 부재다.
또 이런 배움도 얻었다.
장래 더 큰 지지자를 확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당장 누군가의 가슴을 아프게 해야만 한다면,
그 길을 취해서는 안될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속에 30분이 지났다. 스텝에 리듬이 붙는다. 자박 자박 자박...
호흡이 골라지고, 몸과 마음이 평안해진다. 정만 편안하다.
개구리소리는 여전히 요란하고, 소나무 사이로 바람들이 휘이잉...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하늘에는 뭉크의 그림처럼 어두운 구름이 깔려있고, 하늘은 비를 흩뿌리고 있다.
호수위로 바람이 가면 물결이 일듯, 숲 위로 바람이 가면 나뭇잎들 나풀거리듯,
넓은 들녘에 바람이 가면 푸른 벼 일제히 허리를 뉘듯,
아스팔트 위에도 바람이 지나가자 비보라가 인다.
저렇듯 바람은 어느 곳에든 흔적을 만들며 지나간다.
바람은 형체가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
보이지 않아도 실체는 있는 것이 철리이리라.

"송창식군, 그 사람 노래 참 기막히지. 내 시에 곡을 붙였다며 기타까지 메고
집으로 찾아와 노래를 부르는데, 후련하게 확 터진 소리면서도 뭔가 서럽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눈 부신 푸르름 속에도 설움이 있는데 우리 삶이야 오죽 서럽고 불쌍하겠는가."
미당은 그의 시 '푸르른 날'에 곡을 붙인 송창식의 노래를 그렇게 평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가을 꽃자리 /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별별 생각이 다 든다. 태풍이 부는 산속에서 새벽길을 달리며 왠 미당이며 송창식인가?
그렇게 죽도록 그리워할 그 무엇이 아직 있는가, 그대?

비는 제법 거세진다. 리조트 입구까지 계속되는 내리막길을 돌아서니 이제는 오르막길이다.
이제 간간이 지나가는 투숙객들 차량이 보인다. 저들은 나를 두고 무슨 말을 할까?
무심코 궁금해지다가 의외로 이내 담담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무슨 말을 하든 대수랴. 그냥 두라지.
다만 얼굴로 흘러내려 시야를 가리는 빗물만 손으로 훔치며, 잔잔하게 달린다.

꼭 한시간에서 몇 분 모자라는 달리기를 마치고 방에 돌아왔다.
우선 젖은 옷을 벗어 빗물을 뽈깡 짠다.
요즘은 세탁기 때문에 빨래를 짜는 일이 적어졌다. 빨래짜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손아귀힘이 약한 주부들은 항상 고생을 했다.
큰 빨래라도 한 날은 손목이 시어 고생을 했다.
이어서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어 한모금 마시고, 배를 깔고 누워 글을 적는다.
만끽하는 평화로움.

이제 7시 30분. 창밖으로 편안한 밤을 보냈을 가족과 커플들을 태운 차량들이 제법 지나간다.
비와 바람이 잠시 멎었다. 멀리 보이는 덕유산 연봉은 아직 안개속에 아득하다.
안개속에서는 모든 것들이 희미하다.
가까이 있는 소나무는 더욱 푸르고 선명하다.
정지상의 글이 생각난다.

우헐장제초색다 (雨歇長堤草色多) 송군남포동비가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수하시진 (大洞江水何時盡) 별루년년첨록파 (別淚年年添綠波)
비 갠 후 녹음 더욱 짙 푸른데 님을 떠나보낸 슬픈 내 노래여
대동강물 어찌 마를 날 있으리 이별의 내 눈물 해마다 흘러드는데...

그래, 내 마음속에는 어떤 님하나 키우고 있느냐?
떠나 보내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사위는 고요하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더욱 선명하다. 계곡의 물소리는 여전하다.
그러나 고요하다.
아, 그러나 이 평온, 고요, 평화를 세속의 모든 것들이 다시금, 이내 깨뜨리며 밀려오리니,
그래 이제 다음 스케쥴로, 일상으로 갈 시간이다.
새벽의 태풍중주, 시간여행을 끝낼 시간이다.
안녕,
내 안의 나여...

(2002. 7. 6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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