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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기 안경잽이 마라토너의 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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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복진 작성일04-12-28 17:50 조회6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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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기 안경잽이 마라토너의 설움

안녕 하십니까.

서울
고덕 달림이
박 복진입니다.

요즈음 새벽 뜀 길은 너무 춥습니다.
보온만을 위한 복장은 뛰기에 너무 거추장스럽고, 뜀질만을 위한다면 보온 복장은
자연 소홀해지고... 그래서 윗도리는 그래도 어느 정도 몸을 감싸지만 아랫도리는
정도껏 추위를 감내 할 각오로 최소한의 보온만을 생각하고 나가기 일쑤지요.
사실 어느 정도 뛰기 시작하면 그 정도의 추위는 또 견딜 만 해 지기도 합니다.

단지, 새벽 뜀질의 복장을 갖추고 나가기 전 나를 많이 망설이게 만드는 것은,
얼굴을 가리는 안면 위장 마스크의 착용여부입니다. 강변의 칼바람을 막는 것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나, 문제는 그 마스크를 착용해서 완벽한 방한 장구가 갖춰
졌다고 생각했을 때, 바로 걸리는 게 안경입니다. 마스크를 하면 입에서 품어 나오는
입김 때문에 안경에 김이 서려 금방 멈춰 서게 되지요.

지독한 근시인 저는, 안경을 벗으면 티.브이도 안보입니다. 그래서 캄캄한 새벽 뜀 길
을 가는 저에게 많은 망설임을 주는 게 바로 이 안경입니다. 안경을 쓰자니 몇 발자국
도 못가서 안경에 서린 김 때문에 뜀질이 멈춰지지요, 안경을 벗자니 길바닥의 박힌
돌이나 움푹 파인 물구덩이 자국도 부웅 떠서 평지로 보여 어이쿠 ! 하고 나가 자빠지
기가 일쑤이지요, 그야말로 진퇴양난입니다. 그래도 조금은 다행인 게, 매일 나가
뛰는 길이라 내 뜀 길의 웅덩이, 풀뿌리, 돌무더기를 어느 정도 꿰차고 있으니,
용감하게 안경을 벗고, 위장 마스크를 얼굴에 터억! 하니 뒤집어쓰고 아파트 현관을
나가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또 하나 있습니다.
아파트 현관을 나와 단지를 지나 개내 천 뚝 위를 지나 본격적인 에스퍼란자스 뜀 길
에 올라서기까지 아는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되는 서글픈 현실이 있습니다. 바로 코 앞
까지 사람이 와도 , 지독한 근시 때문에 저는 마주치는 사람을 못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523 동 그 사람 같은 데, 새벽에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모가지 뻣뻣하니 들고
가는 저는 이내 싸가지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게 뻔합니다. 아니 내 귀에 들어
오지 않아서 그렇지 벌써 그렇게 낙인이 찍혔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옛날 말이 그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울고 있는 망아지, 벙어리는 하품하는 줄로 잘못
알고 있다고요. 본인의 끓고 있는 속은 전혀 모른 채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안경잽이에게 치명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단지를 나와 게 내 천 뚝 위, 얼어붙은 겨울 새벽길을 살인적인 속도로 내달아 오는
차량들로부터의 안전지대로 진입하려면 횡단보도가 있는데, 이 신호는 아무 차량에게도
지켜지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한적한 변두리 아파트 단지 횡단보도이다 보니 모든 차량이
오던 속도 그대로 그냥 내어 달립니다. 비록 파란 불이라고는 하나 달려오는 차량이 과연
서줄지 모든 관심을 기울여 달려오는 그 운전자와 시선을 맞추고 횡단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데, 안경이 없는 지독한 이 근시로 그 운전자와 시선을 맞출 도리가 없는 게지요.
작동하는 신호등은 무시하고, 달려오는 운전자와 시선을 맞추어 횡단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참 서글픈 현실. 저는 이 횡단보도에서 달려오는 운전자와 무던히도 싸워보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내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서글픈 안경잽이에게도 즐거움은 있습니다.
한강변으로 나와 둔치 뚝 위에 올라서면 최근 들어 새로 들어선 강 건너 덕소 쪽 고층
아파트 와 그 곳을 지나가는 도로의 가로등 불빛들이 길게 강 위에 머리를 떨쿠고 떨고
있는 게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시력이 좋아 초점이 맞았다면 길게 일자로 보일 그 불빛
들이 지독한 근시인 나의 눈에는 부웅 떠서 굵게, 아주 굵게 커다란 빛의 덩어리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즉 야광의 아름다움이 크게 과장되어 선이 아닌 빛의 기둥으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안경 벗은 내 눈에 한강에 길게 박힌 그 불기둥들은 설치 미술로도
보이기까지 하니, 이 점은 눈 좋은 다른 달림이 들은 맛보지 못할 저만의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날이 밝아져서 아파트 단지 입구가 부산해지고 출근을 위해
주민들의 왕래가 많아지면, 나는 그만큼 아는 사람들과 지나칠 확률이 더 많아지고,
또 그 만큼 더 싸가지가 없어지게 되니, 날이 더 밝아지기 전에 얼른 집으로 되돌아
가야 하는 숙명이 있지요

사람들을 피해 골목으로, 또 앞에 오는 사람의 눈을 피해 일부러 허드레 동작을 하며
짐짓 못 본체 안 해도 될 수고를 하며 간신히 집 앞까지 다 와서 우리 동, 아파트 현관
에 들어섭니다. 이제 날은 어느 정도 훤히 밝았지요. 계단의 방범 불 스위치를 찾아
딸깍하고 끄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 위에서 어느 분이 내려옵니다. 꼭두새벽
이 시각에 지금 내려오시면 틀림없이 우리 계단 위에 사시는 분이시니 누군지 잘은
모르지만 내 집 위층 이웃으로 알고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합니다.

“ 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지금 출근 하세요?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에게 잠옷 바람으로 거실을 건너가던 아내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합니다.

“ 방금 계단에서 당신 올라오다 누구 사람 만났어요? 방금 그 분 위층 아저씨와
이야기 하고 내려가는 것 같던데......
방금 내려간 그 분, 아파트 관리소 그 분, 출근은 무슨 출근? 어제 밤 당직하고 이제
퇴근해야겠다고 하고 내려가는 것 같더구만요. ....어서 빨리 씻어요, 밥 먹게.... “

서울
고덕 달림이
박 복진
www.ohmysho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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