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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험, 잊어버리기 쉬운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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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석산 작성일04-01-28 11:56 조회4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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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험, 잊어버리기 쉬운 기쁨

그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민망함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그의 가슴은 벅차 있었을 것이다. 얼굴 하나 가득 불그레한 미소가 보였다. 혹시, 은하수 어딘가 숨겨 놓은 옛 애인에게 보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첫 사랑이란 애틋하지 않던가?
아니, 첫 사랑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동화 속의 왕자나 기사 정도를 꿈꾸는 지도 모른다. 흐뭇해하는 얼굴을 보니 무슨 상상인들 못하랴? 아니면 마법에 걸려 개구리나 야수 같은 것으로 살아가다가 때가 이르면 사람으로 돌아온다는 얘기들을 떠올리는 지도 모른다. 물론 실물보다는 애니메이션 영상에 음악까지 곁들여.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옛 생각이 떠오른다. 힘들게 이룩한 첫 경험. 그의 오른 손이 만지작거리는 것이 분명 완주 메달이다. 한 다리를 꼬고 서 있는 품이 나의 첫 경험을 닮아 있다. 아, 저런 모습을 보면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저 사람은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초보일 것이다. 축하합니다! 라는 소리에 빙그레 웃어 준다.

"몇 번째십니까?"
"두 번째입니다."
"아, 그러세요? 저는 이 번이 다섯 번 째입니다."
"전 아홉 번째입니다."

2000년 10월 3일. 이러저러한 대화를 하는 사람들 옆에 서 있었다. 속으로 '난 처음인데...' 라면서. 그렇게 구파발에서 출발하여 임진각까지 달려갔다. 그런데 왜 그렇게 빨리들 달려가는 지... 얼마 가지 않아 차량 통제가 점차 풀어질 기미가 보였다. 아니 풀어져 있었다. 중간 반환점까지는 도중에 차와 같이 달렸으니까. 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다. 뒤에는 더욱 없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들리지 않는 야유 소리 때문에 머리가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호흡이 가빠졌지만 다리는 참지 못하고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중간 반환점을 지나서는 그래도 살만 했다. 그 뒤로는 차량 통제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었다. 반대편에서 몇 사람이 뛰어 오는 것이 보였다. 꼴찌가 아니라는 것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20km 지점을 통과 하니 출발한 지 2시간이 가까워 온다. 하프 표지점을 지나니 2시간이 조금 넘었다. 머릿속에서는 연신 계산기가 오고 간다. 머릿속에서 디지털 숫자가 깜빡거렸다. 그렇다면, 4시간이 조금 넘겠군...

그 날 6시간 2분만에 피니쉬 라인을 통과했다. 꼴찌인가? 자원 봉사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 꼴찌는 아닌 것 같았다.

"아, 그 사람은 잘 뛰지도 못하면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데..."
"그렇게 뛰려면 왜 뛰어?"
"글세 말야. 나 같으면 저렇게 안 뛰어..."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어떤 분 때문에 꼴찌는 면했다. 대신에 그렇게 뛸 바에는 차라리 오지나 말아야 할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갈증 때문에 개천으로 뛰어 들어 가고 싶었던 마음. 지나가는 여중생들이 빨아먹는 아이스크림이라도 얻어먹고 싶었던 생각들. 숫기가 없어 겨우 음식점에서 찬 물 한 바가지 얻어먹었던 기억. 그러면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을 했었던 순간들. 그러나 그들에게 그 말들을 할 기력도 없었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것은 먼 훗날의, 지금의 추억으로 만족할 수 있으니까.
기억해 보니 내 마음은 이랬다. 이제 완주를 했으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포기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 뒤에 나의 인생의 많은 부분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강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마라톤을 하는 한에서는...

그 뒤로 지금까지 총 58회의 마라톤을 완주했다. 출발점에서 출발하고 나서는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런 내게도 웃지 못할 작은 에피소드가 있다.
첫 완주 이후, 내 집 한 쪽 벽에는 첫 완주 메달, 기념 티, 기록증 등이 걸려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대회에 참가하러 가기 전에, 나와 내 가족은 그 앞에 선다. 그리고 다짐을 했다. 잘 달리고 오겠노라고. 깜빡 잊어버리고 나갔다가도 얼른 되돌아와 그렇게 했었다. 그렇게 첫 완주를 기념했다. 또 마음 속에 간직해 왔었다. 지금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마라톤 대회에 다수 참가하다 보니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지난 1월 거제도 마라톤 대회에서 본 그 분이 떠오른다. 차르르... 무성 영화의 한 장면이 돌아가는 것 같다. 필름이 오래 되어 줄이 죽죽 간, 더불어 어색한 표정과 몸짓. 그래도 감동만은 짙게 드리운 것. 첫 경험이라고 해 보았자 몇 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감동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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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올해 1월부터 컬럼을 연재하고 있는 곳입니다.
http://www.focusmarathon.com/main/main.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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