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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기]처음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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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광선 작성일03-11-07 11:24 조회8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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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마음으로...

서울울트라마라톤대회의 100킬로 부문에서 13시간 1분의 기록으로 완주한 다음 날,
스트레칭이라도 하려고 다니던 헬스클럽에 나갔더니
한 분이 ‘100킬로 뛰셨다면서요? 대단하시네요’라며 악수를 청한다.

좋은 기록도 아닌데 쑥스러워서 그냥 웃음으로만 답하고 지나가는데,
어떻게들 알았는지 보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건넨다.
대회에 참가한다고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아내를 통해 들었나...

울트라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기록을 떠나서 13시간동안 쉬지 않고
뛰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놀라움인 것 같다.
하긴 나도 뛰어보기 전에는 그랬었다.
거리에 압도 당하고, 시간에 기죽고...

정상적인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는 군대이지만
남자들은 평생 군대 이야기를 하고,
집집마다 있는 아이지만 여자들은 평생 자신이 아이 낳던 얘기를 하고 산다.

몇 백명이 10시간을 넘게 뛰는 그 길고도 고독한 레이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시 경험해보지 못할 드라마틱한 여정과 스토리를 선사해주었다.

거리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보고자 참가했던 서울마라톤클럽의 12시간 지속주와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에서 차례로 왼쪽 발바닥과 오른쪽 무릎에 부상을 입어
서울울트라마라톤대회에 참가할 당시는 몸 상태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 후 42km지점에서 오른쪽 발에 쥐가 났고,
무릎 통증도 너무 심해 압박붕대를 감고 뛰었다.
90킬로 지점에서는 한기가 몰려와 불쌍하게도 참가자 중 유일하게 비닐 우의를
걸치고 뛰었다. 거기다가 자전거 손잡이에 비닐우의가 찢어져 너덜너덜 해졌으니
아마도 더 볼쌍 사나웠을 것이다.

97킬로 지점에서는 지나가던 행인이 다리 통증으로 힘들어 하고 있는 내게
다가와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도움을 받다니,
세상은 참 따뜻한 곳이다.
고마움과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뛰었다.

왜 이렇게 뛰는걸까? 자신을 찾기 위해? 무언가를 깨닫기 위해?
뛰기 전에도 뛰고 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일뿐 변한 건 없는데...
다신 충전하기 위해 배터리를 모두 방전하려는 양 난 내 몸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내고 있었다.

99km, 다 왔다고 안도할 무렵 저 앞에서 낯익은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아내였다. 너무 반가워 눈물이 글썽인다.
그러면서도 괜히
‘힘든데, 왜 여기까지 왔어?’
‘내가 동반주 해줄께.’
높은 신발을 신었길래, ‘그 신발로 어떻게 뛰려고?’
‘99킬로를 뛴 사람도 있는데, 1킬로쯤이야...’
‘아...끝이 안보이네.’
무지개 다리를 가리키며 ‘저 다리만 넘으면 돼’ 한다.

그 순간 아직도 내 몸에 이런 에너지가 남았나 싶을 정도로 힘이 솟았다. 그러나 힘차게 달려서 마지막 골인하는 순간 들려오는 소리는 '축하합니다' 가
아니라 '눈 감고 찍혔으니 다시 뛰어 오세요'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다시 보면 인생은 한 편의 코미디이기도 하다. 100킬로 울트라마라톤을 신청해 놓고는 모든 생활의 중심에 울트라가 있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다른 일정을 잡을 때도 울트라 대회를 염두에 두고 생활하였다.
밥을 먹을 때도, 차 안에서도, 집에서 쉴 때도 대화의 주제는 울트라였다.
먹지 않던 파워젤을 사고, 보약을 먹고, 새 신발에, 새 운동복에, 새 모자에...

어느 날 그 동안 잠자코 있던 아내가 ‘올림픽 나가냐?’ 하며 눈을 흘긴다.
달리기를 시작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좀 컸다(?)고 ‘울트라’ ‘울트라’ 하는
내가 좀 얄미웠던 모양이다.

하루는 대화를 하다가 ‘당신, 은근히 잘난 척 하는 거 알아요?
이제 울트라 한다 이거지? 풀코스만 뛰어도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던 때가 얼마 전이야. 초심을 잊으면 안돼.’
절대 그러려던 의도가 아니었는데, 이제 조금 자신감이 붙은 것 뿐인데,
그 자신감이 다른 사람의 눈에 자만심이나 잘난 척으로 보였다면 그건 나의 책임이다.

달리기를 시작할 무렵 많은 마라톤 관련 사이트에 올려진 글들을 보며,
풀코스 안뛰면 사람도 아닌가? 울트라 아니면 마라톤도 아닌가?
나도 반감을 가진 적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마라톤의 묘미를 조금이나마 알 것같은 내가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게 비쳐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뿔사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에 욕심 낼 무렵, 달리기를 알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달리면서 욕심이 버려졌다.
이렇게 뛸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뛰고 싶을 때 뛸 수 있는 시간과,
그 만큼의 건강과, 그 만큼의 경제적 조건과,
그 만큼의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다른 욕심은 부리지 말자,
생각했었다.

그런데 뛰면서 다른 욕심이 생겨버렸다.
좀 더 빠르게 뛰고 싶어졌고, 좀 더 멀리 뛰고 싶어졌다.
좀 더 폼나는 장비를 갖추고 싶어졌다.

이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겠다.
내가 뛴 거리에 연연하지도 말아야겠다.
내가 또 얼마나 뛰어가든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여전히 또 나일테니까 말이다.

대회관계자분과 자원봉사자 여러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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