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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을 들고 선도에서 설치는 노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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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우 작성일02-01-12 10:24 조회7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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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통일을 위한 국토종단 달리기-2

제1구간 휴식장소인 원불교 앞에서 준비해놓은 떡을 먹으며 잠시 몸을 추스르자
출발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대열로 합류하여 서서히 달려가자
빙판에 넘어지면서 다쳤던 발목과 무릎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심하지 않았기에 무시했지만,
국종달이 끝나고 자세히 보니 피멍과 함께 가벼운 상처가 나 있었다.

노량진으로 향하는 비스듬한 고갯길을 넘어서자
국종달 행렬은 한강대교(漢江大橋)로 진입했다.

한강대교는 1917년에 준공된, 한강 위에 최초로 가설된 인도교로.
대한제국(大韓帝國) 때, 이것이 완성되자,
당시 교통상의 편익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의 큰 명물로 장안의 화제를 독점하였는데,
여름철 야간에는 장식 전등이 화려하게 켜져서 산책 객들을 불러들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교량의 개통으로 영등포 ·노량진 일대가 급격히 도시화(都市化) 되었지만,
한국전쟁 때에는 다리의 2, 3, 5번째 경간이 폭파되어
수많은 피난민들의 희생을 가져오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한강다리 위를 달리자, 강바람이 차갑게 귓볼을 시리게 했다.
목에 걸쳐두었던 귀마개를 올리자
중간쯤에서 나란히 달리던 런하이 조대연님이 선창을 하면서 국종달 대열을 주도해갔다.
뛰는 폼이 두꺼비 뒷모습 같아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았는데
B.B클럽 뱃심으로 버티는지 목소리는 우렁차기만 했다.
이를 본 지구사랑 모임 이동윤박사님이 불안했는지
"무리하지 마소! 그러다 쓰러지면 약 없데이!"
"예! 알겠습니다."
푸짐한 미소를 지으며 응대하는 그의 모습이 동안(童顔)처럼 느껴졌다.

다리를 건네자, 용산역이 한밤중에 출발하는 완행열차의 정감을 말해주는 듯
건물들의 뒤편에 나지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자정이 다되어서 발차하는 목포행 완행열차는
지나는 역마다 멈추면서 서민들의 애환들을 실어 날랐다.
처음 본 사람일지라도 열차 안에서 옆에 앉게 되면
어느 덧 오랜 지기처럼 가까워져 지루한 여행길에 말동무가 되었다.
그러다 서대전역에 이르면, 약 10분간 정차하여 먹는 막국수는
급한 것만큼이나 서로의 속을 푸짐하게만 했다.

국토종단 깃발을 나부끼며 달려가는 우리들을 향해
듬성듬성 마주하는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주곤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 닭 보는 듯 멀뚱멀뚱 하기만 했다.
허기사, 마라톤 행렬도 잘 이해하지 못할 건데
국종달 행사까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때 낯익은 러너 한 분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면서 앞쪽으로 추월해가고 있었다.
마라톤이 좋아 장가가는 것마저 잊어버린 이명현님이었다.
풀코스 기록이 5시간 전후인 그는
어느 대회에 참가하든 주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다.
왜냐하면 항상 맨 앞에서 출발하여 거침없이 내달리다가
금새 뒤쳐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름마저 옛날 문교부장관과 동명(同名)이여서
장관직에 물러나 할 일이 없으닌께, 마라톤이나 하러 다닌다고 농(弄)을 치곤 했다.
그런데 달리는 모습이 또 전력질주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얼마가지 않아 다시 뒤쳐져 버스에 올라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주로(走路)는 이제 "돌아가는 삼각지"에 도달했다.
1967년, 2억 3천만원의 거액을 들여 완공된 삼각지 입체교차로는
시민들의 애정이 담겨 있는 서울의 명물이었다.
그렇기에 우리 나라 가요사상 드물게 20여주 연속 1위를 차지한
가수 배호(裵湖 1942-1971) 선생의 노래곡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또한 이곳이 당시 최초로 회전하는 교차로였기에 우스운 일도 많이 일어났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관광버스가 돌다가 그만, 방향감각을 잃어 다른 길로 내려간 일이나,
시골 노인들을 태운 관광버스는 한 바퀴 돌 때마다 일년을 더 산다고 하여
일곱 번을 돌다 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설계상의 문제와 더불어 노후된 구조물 때문에
지금은 모두 헐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평면 교차로로 변해져 있다.

삼각지를 지나자
길가를 지나치는 미군들이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보내주곤 했다.
저들도 달리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궁금한 생각이 들면서 용산 미군기지에 대한 찹찹한 심정이 발길을 짓눌리는 것 같았다.
수도 서울의 심장부에 자리잡은 그들은
우리 나라를 지켜준다는 명분이 더 강하게 남아 있지만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곳으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단된 현실 앞에선 우리들의 자존심을 내세우기엔
명분이 그들의 주장대로 춤추기에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한반도 통일을 염원하는 국토 종단 달리기가
그들의 눈에는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 지 의문스럽기만 했다.

이제 국종달 행렬은
철도교통의 중심지로써 열차의 최종 종착점이면서, 시발점인 서울역에 이르렀다.
1925년 준공된 서울역은 독일 사람인 C.K. 라란데가 설계한 르네상스식 건물로
웅장하고 정교한 복고풍의 돔과 고딕을 가미한 붉은 벽돌의 벽면,
그리고 하얀 화강석으로 종횡을 구분하는 특이한 설계로 되어 있다

하지만 나에게 서울역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홀로 상경할 때 모습대로 항상 두려움 속에 신비의 대상이다.
나를 서울까지 동행해 줄 동네 어른과 함께 나주의 영산포역에서 기차를 타야 했는데
그분을 놓치고 홀로 특급열차(지금의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을 때에는
기차가 갈 때까지 가다가 최종적으로 멈춘 곳이라기에 신비스럽기만 했다.
그렇지만 대합실에서 기다릴 거라던 고모님의 모습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몰려왔다.
서울 가면 눈 뜬 사람 코도 베어간다는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내 코가 언제 날아갈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싹 긴장한 채로 두리번거리며 서울역 광장에 나오자
왼편에 넓은 길을 막고 서 있는 고전 건축물이 보였다.
속으로 저것이 그 유명한 남대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호기심으로 보고 있는데
저편에서 나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는 청년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겁이 덜컥 났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내 등을 두드리며 한번 따라와보라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흑석동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는데
또다시 누가 내 등을 두드렸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떨리는 가슴을 안고 두려움 속에 고개를 슬며시 돌려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고모님이 놀란 표정을 짓고 서 계셨다.

지금도 서울역에 이르면, 그 당시의 생각들이 긴 여운처럼 드리워져
그 두려워했던 청년들의 모습이 의문 속에서 아른거리곤 한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내가 그들을 따라갔다면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렇기에 내게 서울역은 신비로움 속에 두려움으로 휩싸이게 된다.

서울역 광장을 끼고 돌면서 의주로 쪽으로 달려가는데
오른 편에 그 옛날 그 모습으로 숭례문이 가지 않는 길처럼 신비롭게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동방예의지국란 뜻으로 작명하여 완공된 숭례문(崇禮門)은
도성(都城) 8대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남대문(南大門)이다.
그것은 도성(都城)의 정남(正南)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이 출입하고
중국, 일본 등 외국사절들을 맞이하는 서울의 관문(關門)이기 때문에
가장 웅대하게 건축되었다.
그러나 최초의 숭례문은 지대(地臺)가 낮아서 볼품이 없게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에 구애되어 남대문의 지대를 높여서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야
경복궁의 포국(抱局)을 아늑하게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땅을 높게 돋우어 개축하라는 세종(世宗)의 뜻에 따라
세종 30년(1448)에 다시 축조되었다.

또한 숭례문(崇禮門)의 현판, 편액글자는
조선 태종(太宗)의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의 글씨로 유명한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임진왜란 때 양녕대군이 쓴 액자가 없어지자, 누군가 새로 현판을 써서 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달 때마다 얼마가지 않아 금방 떨어져서 사라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상한 일이라고 의아해 했는데
광해군(光海君) 때, 어느 날 밤, 남대문을 향해 서광이 번쩍거렸다.
그 서기(瑞氣)를 따라 청파 배다리에 있는 웅덩이를 팠는데
양녕대군이 친히 쓴 숭례문의 현판이 나왔다.
그 현판을 달았더니 다시는 떨어지지 않아
오늘날까지 우리가 보고있는 숭례문 현판이 되었다고 한다.

이제 국종달 대열은 깃발을 들고 선도에서 설치는 노총각 이명현님을 앞세우고
서대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계속됩니다.

송파세상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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