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떠난 나뭇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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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우 작성일00-12-08 01:47 조회8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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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들을 떠나 보낸 나무들이
외로움을 달래는 듯 쓸쓸히 하늘만 보고 있다.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가
무엇을 위해서 그들은 나무를 떠나버렸을까?
초록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던 시절이 그리울 만도 한데
그들은 그들을 태우는 소각로(燒却爐) 속이 당연한 것처럼
지나버린 나날들을 태워 버리고 있다.
아직까지도 내게 아련히 떠오르는 큰 누님이 있다.
아름다운 인상에 정이 많았던 것으로 내게 남아 있다.
항상 나를 등에 업고 다니면서 누구보다 날 사랑해 주었고
내가 갖고 싶어하면 무엇이든 늘 구해다 내 손에 지워 주곤 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큰 누님 같은 착각이 들어 곁으로 다가 가 보호받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한다.
큰 누님은 내가 3살 때 결혼해서 인정 많은 매형을 만나게 되었다.
매형은 항상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머리를 빗곤 했었다.
내가 신기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린 내 머리에도 기름을 발라 빗어 주곤 했었다.
누님은 결혼 후, 병원에 자주 다니곤 했는데
그 때마다 날 등에 업거나 손잡고 가면서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이 한없이 우셨다.
아버님도 힘없는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시면서 긴 한숨을 쉬셨다.
그 이후 큰 누님과 매형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6살이 되었을 때,
한 동안 보이지 않던 매형이 누님과 함께 집에 왔다.
그런데 누님의 그 아름답던 얼굴은 어디 가고 엉뚱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님은 전처럼 날 예뻐해 주지도 않고, 무엇을 사주지도 않았다.
어머님은 매형과 누님을 붙잡고 하염없이 흐느끼기만 하셨다.
아버님도 매형부부가 인사하고 떠난 후, 한없이 하늘만 보고 눈물을 닦고 계셨다.
그 후로도 이따금씩 매형부부가 우리 집에 왔었다.
그 때마다 집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을 반갑게 맞아 주게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난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 매형부부를 볼 수 없었다.
가끔 시골집에 내려가면 매형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매형부인"이라는 이상한 용어를 쓰게 되었다.
매형은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 집과 계속 가깝게 지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서로의 관계가 거의 형식에 불과할 뿐, 겉돌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매형부부는 적극적으로 시골 어머님을 찾아뵈었고
동네사람들에게 음식 등을 대접하곤 했다.
그것을 본 동네사람들은
대딸이 효녀노릇을 다 한다며 매형부부를 칭찬하곤 했었다.
1970년대 후반
내가 서울에서 어렵게 공부하고 있을 때, 큰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성산동 매형 집에 있으닌까, 이리 와라!"
순간적으로 나는
"그 집에 내가 왜 갑니까?"
형님에게 반항하고 말았다.
'성산동 매형집? 성산동 누나집이 아니고, 왜 매형집인가?'
큰 누님이 낙엽이 되어 나무를 떠나버린 지, 어언 15년 이상이 흘렀기에
그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지만,
내 마음속의 큰 누님은 항상 아름답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 나는 성산동을 끝내 가지 않았다.
그 후,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아무리 남이라지만 그 사람들이 하는 행실이 너무도 고맙다면서
형님들과 어머님께선 시간을 내서 성산동을 한번 찾아 가보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나는 화를 내면서 강하게 거부해 버렸다.
사실, 화를 내며 거부는 했지만
내 어릴 적, 매형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기만 했다.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빗은 머리와
깨끗하게 차려입은 옷차림이 눈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런 매형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점점 더해가고 있을 무렵,
큰 형님으로부터 또 전화가 왔다.
"여기 성산동인데, 매형이 너를 무척 보고 싶단다."
내가 다시 머뭇거리고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정 그렇다면, 매형만 한번 슬쩍 보고, 그냥 가거라!"
"네, 알겠습니다."
못이긴 척하고 성산동으로 향했다.
허름한 주택 이였다.
매형은 탁구라켓을 생산하는 조그마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매형은 나를 보자! 순간적으로 다가와 부둥켜안고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나 또한 지난날의 회한(悔恨)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형님은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성산동으로 날 불렀다.
성산동을 자주 들리기 시작하면서 매형부부와 점점 친해지기 시작했다.
"매형부인"도 내게 깍듯이 잘 해주었기에 서서히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제 "매형부인"이라는 이상한 용어가 어색해졌다.
그래서 난 "매형부인"을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산동을 들릴 때마다 나는 고등학생인 매형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그 중에 수학을 관심 있게 지도해주었다.
신군부(新軍部)의 과외금지 조치로 서슬 퍼런 시절이라
부족한 과목을 보충할 방도가 없었는데, 내가 구세주 역할을 해준 셈이 되었다.
매형은 내가 어렵게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성산동을 갈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내주머니에다 10만원씩을 넣어 두었다.
내가 깜짝 놀라면서 내놓으면
손으로 내 입을 막으면서 그냥 넣어두라고 사정했었다.
그리고 집을 나서려고 하면 누나는 매형 몰래 10만원을 책가방 속에 넣어주면서
책이라도 사보라고 했었다.
그러면 나는 두 분이 있는 곳에서 모든 돈을 내놓아 버렸다.
서로 놀라 박장대소(拍掌大笑) 하면서 10만원만이라도 가져라가고 사정하곤 했었다.
그 때 10만원은 어려웠던 내겐 거의 생명수와 같았다.
12월3일 진주시민마라톤대회를 참가하고 집에 오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다음 날 아침,
매형의 부음(訃音)을 알리는 떨리는 누나의 목소리를 접하게 되었다.
만감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선량하던 사람을 무슨 죄가 있었기에, 신은 이리도 빨리 데려가야 한단 말인가?
당뇨로 몸이 극도로 불편해져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퇴원하면 현우한테 달리기를 배워 5km 마라톤대회에 한번 출전해보고 싶다."
누나가 전하는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와 흐느끼며 하늘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옛날, 아버님이 매형부부를 보내고, 한숨을 쉬며 하늘을 보았던 것처럼......
묘지를 남기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한줌의 재로 변해버린 것을 보고
성실히 살다간 지난날의 발자취들이 허망하기만 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으며, 무엇 때문에 살다가 가야만 하는가?
아무리 물어도 해답을 찾을 수 없기에 신(神)을 생각했고 종교가 생겼을까?
생로병사윤회(生老病死輪廻)를 끊는 것을 불교에서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해탈을 하면 생로병사 윤회에서 진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
송파세상 김현우
외로움을 달래는 듯 쓸쓸히 하늘만 보고 있다.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가
무엇을 위해서 그들은 나무를 떠나버렸을까?
초록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던 시절이 그리울 만도 한데
그들은 그들을 태우는 소각로(燒却爐) 속이 당연한 것처럼
지나버린 나날들을 태워 버리고 있다.
아직까지도 내게 아련히 떠오르는 큰 누님이 있다.
아름다운 인상에 정이 많았던 것으로 내게 남아 있다.
항상 나를 등에 업고 다니면서 누구보다 날 사랑해 주었고
내가 갖고 싶어하면 무엇이든 늘 구해다 내 손에 지워 주곤 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큰 누님 같은 착각이 들어 곁으로 다가 가 보호받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한다.
큰 누님은 내가 3살 때 결혼해서 인정 많은 매형을 만나게 되었다.
매형은 항상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머리를 빗곤 했었다.
내가 신기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린 내 머리에도 기름을 발라 빗어 주곤 했었다.
누님은 결혼 후, 병원에 자주 다니곤 했는데
그 때마다 날 등에 업거나 손잡고 가면서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이 한없이 우셨다.
아버님도 힘없는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시면서 긴 한숨을 쉬셨다.
그 이후 큰 누님과 매형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6살이 되었을 때,
한 동안 보이지 않던 매형이 누님과 함께 집에 왔다.
그런데 누님의 그 아름답던 얼굴은 어디 가고 엉뚱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님은 전처럼 날 예뻐해 주지도 않고, 무엇을 사주지도 않았다.
어머님은 매형과 누님을 붙잡고 하염없이 흐느끼기만 하셨다.
아버님도 매형부부가 인사하고 떠난 후, 한없이 하늘만 보고 눈물을 닦고 계셨다.
그 후로도 이따금씩 매형부부가 우리 집에 왔었다.
그 때마다 집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을 반갑게 맞아 주게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난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 매형부부를 볼 수 없었다.
가끔 시골집에 내려가면 매형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매형부인"이라는 이상한 용어를 쓰게 되었다.
매형은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 집과 계속 가깝게 지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서로의 관계가 거의 형식에 불과할 뿐, 겉돌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매형부부는 적극적으로 시골 어머님을 찾아뵈었고
동네사람들에게 음식 등을 대접하곤 했다.
그것을 본 동네사람들은
대딸이 효녀노릇을 다 한다며 매형부부를 칭찬하곤 했었다.
1970년대 후반
내가 서울에서 어렵게 공부하고 있을 때, 큰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성산동 매형 집에 있으닌까, 이리 와라!"
순간적으로 나는
"그 집에 내가 왜 갑니까?"
형님에게 반항하고 말았다.
'성산동 매형집? 성산동 누나집이 아니고, 왜 매형집인가?'
큰 누님이 낙엽이 되어 나무를 떠나버린 지, 어언 15년 이상이 흘렀기에
그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지만,
내 마음속의 큰 누님은 항상 아름답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 나는 성산동을 끝내 가지 않았다.
그 후,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아무리 남이라지만 그 사람들이 하는 행실이 너무도 고맙다면서
형님들과 어머님께선 시간을 내서 성산동을 한번 찾아 가보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나는 화를 내면서 강하게 거부해 버렸다.
사실, 화를 내며 거부는 했지만
내 어릴 적, 매형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기만 했다.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빗은 머리와
깨끗하게 차려입은 옷차림이 눈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런 매형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점점 더해가고 있을 무렵,
큰 형님으로부터 또 전화가 왔다.
"여기 성산동인데, 매형이 너를 무척 보고 싶단다."
내가 다시 머뭇거리고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정 그렇다면, 매형만 한번 슬쩍 보고, 그냥 가거라!"
"네, 알겠습니다."
못이긴 척하고 성산동으로 향했다.
허름한 주택 이였다.
매형은 탁구라켓을 생산하는 조그마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매형은 나를 보자! 순간적으로 다가와 부둥켜안고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나 또한 지난날의 회한(悔恨)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형님은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성산동으로 날 불렀다.
성산동을 자주 들리기 시작하면서 매형부부와 점점 친해지기 시작했다.
"매형부인"도 내게 깍듯이 잘 해주었기에 서서히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제 "매형부인"이라는 이상한 용어가 어색해졌다.
그래서 난 "매형부인"을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산동을 들릴 때마다 나는 고등학생인 매형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그 중에 수학을 관심 있게 지도해주었다.
신군부(新軍部)의 과외금지 조치로 서슬 퍼런 시절이라
부족한 과목을 보충할 방도가 없었는데, 내가 구세주 역할을 해준 셈이 되었다.
매형은 내가 어렵게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성산동을 갈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내주머니에다 10만원씩을 넣어 두었다.
내가 깜짝 놀라면서 내놓으면
손으로 내 입을 막으면서 그냥 넣어두라고 사정했었다.
그리고 집을 나서려고 하면 누나는 매형 몰래 10만원을 책가방 속에 넣어주면서
책이라도 사보라고 했었다.
그러면 나는 두 분이 있는 곳에서 모든 돈을 내놓아 버렸다.
서로 놀라 박장대소(拍掌大笑) 하면서 10만원만이라도 가져라가고 사정하곤 했었다.
그 때 10만원은 어려웠던 내겐 거의 생명수와 같았다.
12월3일 진주시민마라톤대회를 참가하고 집에 오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다음 날 아침,
매형의 부음(訃音)을 알리는 떨리는 누나의 목소리를 접하게 되었다.
만감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선량하던 사람을 무슨 죄가 있었기에, 신은 이리도 빨리 데려가야 한단 말인가?
당뇨로 몸이 극도로 불편해져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퇴원하면 현우한테 달리기를 배워 5km 마라톤대회에 한번 출전해보고 싶다."
누나가 전하는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와 흐느끼며 하늘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옛날, 아버님이 매형부부를 보내고, 한숨을 쉬며 하늘을 보았던 것처럼......
묘지를 남기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한줌의 재로 변해버린 것을 보고
성실히 살다간 지난날의 발자취들이 허망하기만 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으며, 무엇 때문에 살다가 가야만 하는가?
아무리 물어도 해답을 찾을 수 없기에 신(神)을 생각했고 종교가 생겼을까?
생로병사윤회(生老病死輪廻)를 끊는 것을 불교에서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해탈을 하면 생로병사 윤회에서 진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
송파세상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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