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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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경남 작성일10-08-26 09:10 조회1,9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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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단단한 근육의 소유자였다.짧은 런닝 슈트에서 뿜어내는 탄력넘치는 몸매는 예의 육상선수 처럼 건강미를 자랑했고, 런닝슈트로 가리지 못한 복근은 보디빌더의 그것처럼 단련되어 있었다. 뒤로 말아 올린머리에서 시작된 부드러운 얼굴곡선은 턱으로 내려오면서 갸름한 삼각모양을 하고 있었다. 인중 적당한 선에서 멈춘 코끝은 시원하게 하늘을 향했고,조각달 같은 눈썹은 선한 눈을 감싸고 있었다.탄력있는 몸매가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였다면 얼굴은 부모님에게서 받은 선천적인 선물이라 할 것이었다. 그녀의 몸은 아담했지만, 어디서 그런 폭발적인 힘이 솟아나는지 흡사 증기 기관차 같았다.달리는 모습에서 사열대의 연대장처럼 커다란 힘을 몰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강인한 체력을 갖춘 이성을,그것도 호신술 꽤나 익혔을 법한 여성에게 무슨 이유로 호감을 느꼈는지 모를일이다. 살짝 웃을때면 아랫 입술이 살짝 옆으로 올라가는 미소때문이었을까?아니면 근육질 몸매에 비해 선한 눈을 가진 그녀의 소녀같은 얼굴 때문이었을까? 이도저도 아니면 그녀 덕분에 SUB-4가 가능했기 때문이었을까?
대회가 끝났으니 이제 그녀를 더이상 볼수 없다. 일부러 찾을 수도 없고, 찾는다고 해도 내게는 별다른 명분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어느 단체의 유니폼도 입지 않았고, 주로에서 어느 누구와도 아는체를 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낼 수 있는것은 자원봉사자들이 찍은 그녀의 사진과 배번에 붙은 이름 석자 뿐이다. 이번 혹서기 마라톤에서 그녀와 열번을 마주쳤다.그렇다고 정식 인사를 통해 만난것은 아니고 주로에서 몇번 미소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그것은 내 의지라기 보다 코스 여건상 자연스레 오며가며 만나게 되는 구조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혹서기 대회가 아니라면 그런 인연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혹서기 마라톤이 끝났으니 이제 가슴깊이 그녀를 묻어두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탈고안된 전설 처럼...
혹서기 마라톤...작년에는 자봉으로 참가했고 이번에는 선수로 참가했다. 혹서기 리허설때 이곳을 두번 뛰어봤기 때문에 눈을 감아도 코스는 손에 잡힐 것 처럼 훤했다. 더운 여름에 개최한다고 혹서기 마라톤이라 칭했을 것이다. 올 여름은 참으로 무덥다.지금도 무더위가 언덕을 넘지 못하고 헐덕거리고 있지만 어디 8월15일 광복절 무더위만 하겠는가!!!
친구 아버님 부친상으로 상갓집에서 이틀을 보냈다.조문을 하는 친구들과 술,담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번대회는 완주만을 염두해 둘수 밖에 없었다. 대회 당일 새벽에는 소나기가 쉴새없이 퍼붓고 있었다.벌써 며칠째인지 모른다.눈을 감고 있어도 사나운 비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릴 만큼 빗물은 아스팔트를 따갑게 때리고 있었다.'이런날에 무슨 마라톤 대회~'라고 생각하며 이불속에서 조금 더 뭉개고 싶었고, 비와 함께 감상에 젖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비는 오락가락을 반복하더니,푸득푸득 엔진이 멈춘 듯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 많던 먹구름은 보이지 않고 엷게 퍼진 구름사이에 파란 하늘을 슬쩍슬쩍 내보이고 있었다.
전철을 타고 대공원역에 도착했다. 코끼리 열차 운행코스를 걸어가며 조금 뒤에 진행될 혹서기 마라톤 코스를 그려보았다. 코끼리 열차 코스를 두바퀴 달리고 동물원 언덕과 숲길 가파른 언덕을 뛰겠구나 생각하니,벌써부터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길 오른편 동물원 원숭이는 궁전같은 모양의 건물위에서 호령하듯 사람들을 휘둘러보고 있었다.녀석의 모습이 부러웠다면 내 몸이 가볍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대회장이 가까워질수록 체력은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배번을 수령하고 물품보관소에 배낭을 보관했다. 스트레칭 장소에서 이러저리 몸을 풀며 준비운동으로 시동을 걸었더니,며칠간 찌든 몸은 그런대로 괜찮아 지는것 같았다.
출발신호가 울렸다.풀코스 였기에 처음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코끼리 열차 도로 두바퀴를 천천히, 그리고 조금빠르게 달렸다. 이어서 대공원 내측도로 1.8회를 순환하며 내 앞을 앞질러간 많은 선수들을 볼 수있었다.어느새 숲길언덕으로 접어들었다. 해를 가린 나뭇잎은 숲길에 긴가지를 뻗어 올렸고,곡선으로 이어진 언덕에서도 가지들의 만남은 계속되고 있었다.선수들은 광합성 된 숲길그늘을 머리에 얹고 언덕을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진정한 혹서기 마라톤 코스는 숲길 다섯번 왕복일 것이다. 가파른 언덕은 숨이 터질것 같으면서도 넘쳐나는 먹거리로 한 여름을 축제처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도 많은 자원봉사자 분들이 오셨다.작년 이곳에서 자원봉사를 해본터라 그들의 노고를 충분히 이해한다. 순환코스에서 첫 식수를 마신 건 반환점이 표시된 세번째 급수대였다. 이제부터 선수들 간의 마주보기가 시작되었다.반환을 하고나니 운동을 함께하는 형님,누님,선후배님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서로 화이팅을 외쳐주니 선수들 모두 동반자가 된것 같다. 우리에겐 1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완주가 우선이었다.1회 반환을 했으니 아직은 힘이 있었다.아이스 크림 공급하는 언덕을 쉽게 치고 올라갔다.
그녀를 처음 본건 청계산 물이 폭포가 되어 내려오는 2차 언덕의 어느 길목이었다. 언덕을 달리면서 아는분들을 찾아보기 위해 이리 저리 옆길을 올려보았다.숲길은 나뭇잎이 햇살을 막고 있었지만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온 부채살 햇볕은 조금씩 조금씩 주로를 점거하기 시작했다.많은 선수들이 내리막을 달려오고 있었고,내려가며 올라가며 화이팅을 외쳐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동호회 분들과 인사를 하고 언덕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생면부지의 그녀가 내 눈속으로 성큼 다가왔다. 불과 1초도 안되는 간발의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 모습은 내 머리속에 깊게 각인되기 시작했다.그녀는 내리막을 내려오고 있었고, 난 오르막에서 그녀를 보았다. 많이 본 얼굴이었다. 누구지? 누굴까?를 연발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은 것 같았다.학창시절 그리워했던 이성인지도 모르겠고, 동네에서 아니면 어릴때 본 소꼽놀이 친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세상을 살다보면 생각날 듯,생각날 듯 하면서도 생각나지 일이 간혹 생긴다. 그때 심정은 정말 답답하고 난감하다. 그럴수록 그녀가 누구인지 궁금증은 더해갔다.어느새 급수대가 보였고,내리막이 이어지고 있었다.내리막길을 달리면서도 누구일까하는 궁금증은 더 커졌다. 반환점을 돌아 조금 더 진지한 시선으로 그녀를 봐야겠다고 생각헸다.
피니쉬 라인을 지나 다시 가파른 언덕을 치고 올랐다. 언덕에서 내리막을 달려올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달리는 목적보다 찾아야 할 대상이 목표가 되어버린 엉뚱한 형상이 되고 말았지만 대회장이니 만큼 달리는데 소홀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대상이 바뀜으로서 힘들이지 않고 언덕을 넘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내리막을 화살처럼 달려오는 '1초의 여인'이 내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그녀와 나는 직선거리로 본다면 약 300~400미터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이번에는 의식을 하고 먼곳을 응시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조금 길게 볼수 있었다. 그 시간은 10여초 정도 되지 않았을까?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내 가슴은 쿵쾅거렸다. 그녀가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많이 본듯 한 얼굴인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누굴까?누구였을까?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녀가 누군지 궁금하다고 해서 오던 길을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속도를 낮춰 달릴 수도 없는 일이다.선수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것이 오늘의 본업이었고,감상으로 치우칠 만한 마땅한 썸씽도 없었기 때문이다.그녀와 계속 마주 보려면 좀더 빠른 속도를 요했다. 5회 왕복이면 앞으로 일곱번은 볼수 있을 터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속도를 낮춰 그녀와 함께 뛰거나 뒤로 처지고 싶지는 않았다.그러기에는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반환을 마치고 1차 언덕에서 다시한번 그녀를 보게 되었다. 역시 거침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언덕을 오르는 터라 현저히 속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 몇 가닥이 귀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이제보니 작고 귀여운 귀를 가졌다.역시 누굴까를 생각해 봤지만 기억나지 않았다.순간 그녀의 눈을 가린 머리칼을 올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성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그녀는 아주 잘 뛰는 축에 속했다. 4회전 반환때는 그녀와의 마주보기 시간이 더 일찍 찾아왔다.이제 3번만 왕복하면 되는데 다리는 서서히 풀려가기 시작했다. 언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녀에게 고개숙인 모습을 보여주긴 그랬다. 힘들어도 달려야했다. 다시 반환점을 찍고 그녀를 보았고, 누굴까가 궁금해지는 답답함이 몰려왔다. 다섯번째 반환시점에서는 아이스크림 공급지점에서 그녀를 봤다. 그녀와의 간격은 점점 짧아져가기 시작했다.나는 추락하고 있었고, 그녀는 생동하고 있었다.그렇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내 육체는 탄력을 받는 것 같았다.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언덕을 넘었고, 날아갈 듯 내리막을 달렸다.
세번째 왕복을 하고 반환을 했다. 또다시 가파른 언덕이 이어졌다.이제 고개들기에도 힘이 들었다. 긴 언덕은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어쩔수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다 그녀와 올 것이라 예상되는 지점에서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녀가 내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고, 간발 사잇경이었다.여섯번째 만남이었다. 참 이상했다. 이렇게 자주 볼 수는 없는 거였다. 물론 나의 의식적인 관심으로 그랬겠지만 그녀와는 끈끈한 인연이 생길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보통인연이 아닐것이다. 이제 소통을 하고 싶었다.그녀를 보면 '화이팅'을 외쳐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긴장된 마음으로 반환점을 통과했다. 이제 그녀에게 '화이팅'을 외치는 일만 남았다. 힘든것보다 두근거림이 앞섰다. 아이스크림 공급하는 언덕지점까지 속도를 늦춰 달렸다.이제 그녀가 올 지점이었다. '휴우~'호흡을 크게 들이켰다.역시 그녀가 달려왔다.'화이팅,화이팅~'
그녀와의 첫번째 소통의 문을 열었다.하지만 그녀는 나를 흘깃 쳐다보았을 뿐 그대로 지나쳤다. 일곱바퀴째 부터는 그녀를 만날때 마다 화이팅을 외쳤다.그녀의 반응은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여덟번째도 그랬다. 정확히 아홉바퀴째가 되자 그녀는 신기하게도 나의 화이팅에 '화이팅'으로 화답해주었다. 처음 들어보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단 한 단어만 발음했을 뿐인데 그 목소리는 천상처럼 들렸다...그러면서 이어지는 아랫 입술을 올려 만든 그녀의 미소는 참으로 달콤해 보였다. 백만불짜리 이상이었다. 주위의 응원소리도 그랬지만 그녀와의 소통을 통해 내 몸은 상당한 위로를 받기 시작했다. 그녀를 마주보기 위해 또 달음질을 했다. 열번째 회전에서 그녀는 내 화이팅 소리를 듣고 이번에는 환한 웃음을 선사해주었다. 어쩜 그리도 하얀 치아를 가져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화이팅과 미소덕분으로 한번도 걷지않고 달릴 수 있었다. 아니 걷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골인지점에 도착했다. 3시간 57분... 가파른 언덕치곤 잘 달려준 대회였다. 이제 골인지점으로 달려들어오는 그녀를 맞이하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역동적인 모습으로 팔을 내져으며 힘차게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골인지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수고 하셨습니다! 화이팅'이라고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한발,한발 내 앞으로,골인지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축하는 마이크를 쥔 사회자의 멘트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사회자는 피니쉬 라인을 떠나갈 듯 소리쳤다.'000 화이팅,골인~수고했습니다.대단하십니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를 다시한번 볼수 있었다. 런닝슈트를 입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착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수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밀레의 '만종' 그림을 연상하듯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는 것으로 그녀와 이별해야했다.
내년 혹서기에도 그녀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서기 마라톤 대회가 다가올수록 그녀의 생각도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그날을 기대해 본다... 그녀는 내가 알던 사람도 아니고,내가 그리던 첫 사랑의 얼굴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내 마음속에만 간직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글로서나마 말해주고 싶다. '덕분에 잘 뛰었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화이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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